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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제58칙 광교기주(廣教冀州)

‘이것이 무엇인가’는 선문답의 궁극적 물음 

자신의 고향에 대한 답변 의미는
승의 마음 말끔히 읽어냈다는 것
시심마는 아무것도 아닐수 있고
궁극적이면서 초월일 수도 있어

승이 기주(冀州)의 광교지(廣教志) 화상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지가 말했다. 태어나보니 기주이더라.

문답에서 말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의 원어는 시심마물(是甚麼物)이다. 심마물이라는 용어는 선어록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단적으로는 ‘무엇인가’ 하는 의미이다. 이 말에 대한 궁극적인 정체는 바로 확실한 자각을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으로는 지금이고, 공간으로는 여기이며, 상황으로는 문답하거나 의심을 제기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자각해야 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선문답에서 추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런 점에서 심마물에 대한 대상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 그것도 바로 지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몸에 대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 몸이 무엇인가, 곧 나 자신은 무엇인가, 나아가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증명해가는 질문의 단초에 해당한다. 그래서 심마물에 대한 답변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반면에 모든 것일 수가 있고, 궁극적인 것일 수가 있으며, 나아가서 이것을 초월하는 것은 달리 없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선문답에서 심마물이라는 용어는 여기의 경우처럼 회양 그대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로서 본래면목(本來面目) ‧ 일물(一物) ‧ 차사(此事) ‧ 거(渠) 등을 가리킨다. 그래서 심마물은 천지를 앞서는 근본으로 본래부터 고요하여 형체가 없지만 삼라만상의 주체로서 사시사철의 운행도 따르지 않는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각된 주인공이야말로 그 어떤 것 이상으로 소중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전체 아님이 없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그와 같은 자신의 주체성을 깨치기로 말하면 당장 그 자리에서 일념에 알아차리지만 깨치지 못하고 미혹한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맛도 볼 수가 없고 소리도 들을 수가 없으며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거시기[渠]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지금 질문하고 있는 승은 그 심마물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심마물에 대한 궁금증은 느끼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바로 그것이 질문의 핵심이다. 이에 대하여 광교지 화상은 승의 마음을 말끔하게 읽어내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의 고향에 대한 답변으로 나타나 있다. 자신의 고향은 육신의 고향이기도 하고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육신의 고향은 출신처로서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명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은 자각하기 이전에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어디라고 말할 수도 없다. 광교지 화상은 자신이 태어나보니 바로 그곳이 기주(冀州)라고 답변해준다. 그 기주야말로 자신의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향인 줄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어머니로부터 육신이 태어난 곳으로만 이해한다면 아직은 그 답변에 대한 이해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광교지가 답변해주고 있는 고향이란 위에서 회양이 먼저 답변했던 출신처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미처 답변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의 본래면목에 대한 지시이기도 하다. 광교지의 답변에 대하여 승이 일념에 깨쳤다면 오히려 깨쳤다는 분별의 생각이 남게 되는 것으로 이전의 미혹을 아직도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광교지의 답변이 심마물을 이해하는 단서이지만 결코 그 기주에서 태어났다는 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만약 광교지의 말을 단순하게 고향을 의미하는 어떤 지역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선문답에서 항상 핀잔거리로 언급되고 있는 토끼뿔처럼 유희의 끄나풀일 뿐으로 마치 황금이 노란색이 아니고 침향에 향기가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차라리 승에게 기주에서 태어났다고 고향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은 것만 못하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진다. 그래서 광교지 화상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이해한다는 것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철저한 구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승은 과연 그런 의도를 어느 만큼이나 알아차렸는지 궁금하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79호 / 2021년 3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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