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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번호 폐지’는 옳다

  • 기자칼럼
  • 입력 2021.04.09 21:42
  • 수정 2021.04.12 11:16
  • 호수 1580
  • 댓글 1
구한말 숭례문의 모습.
구한말 숭례문의 모습(1904).

최근 문화재청이 국보·보물·사적 등 문화재 앞에 붙는 지정 번호를 없애기로 했다. ‘문화재를 서열화한다’는 오해를 없애고 ‘국보 1호’ 자격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을 청산하겠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국보 1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바뀐다.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내리며 시작됐다. 이듬해 관보에 196건의 보물·고적·천연기념물 등 1차 지정문화유산이 발표됐고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보신각종, 원각사탑이 보물 1·2·3·4호에 나란히 지정됐다. 당시 국보는 일본 현지 문화재로만 지정했기에 숭례문은 보물 1호가 됐다. 

해방 후에도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정부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며 ‘국보 1호’로 숭례문을 지정했고, 그 자리에 ‘보물 1호’ 흥인지문을 선정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지정일자 순으로 일련 번호가 매겨져 왔다.

그러나 숫자가 갖는 상징성이 제법 컸다. 그러다 보니 문화재 지정번호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국보 1호로 숭례문을 지정한 것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았다. 국보 1호가 은연중 국내 최고 가치를 지닌 문화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정번호 순서’가 ‘문화재 가치 서열’이란 오해가 차츰 깊어져 갈 때쯤 “국보 1호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세차게 등장했다. 1996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가 한창일 때였다. “국보 1호는 우리 문화재 상징인데 숭례문은 대표성이 약하니 이왕이면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팔만대장경, 훈민정문 해례본 같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문화재를 국보 1호로 하자”는 게 주요 이유였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은 “국보 번호는 가치 순서가 아니라 단순 관리 번호”라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2003년 9월 충격적인 논문 한 편이 소개됐다. 당시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었던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가 서울대 국사학과 학술지 ‘한국사론’ 49집에서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이 해체된 돈화문과 달리 보존될 수 있었던 건 이들 건축물이 일본의 조선침략 승전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라 발표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조선 궁궐과 성곽을 항일 상징으로 보고 파괴하려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을 열고 지나갔기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물로 지정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일본학자의 개인적 주장일 수도 있었지만 국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분노가 커졌고 곳곳에서 뼈저린 성찰의 목소리가 일었다. 2005년 감사원도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문화재는 국보 1호로서 상징성이 부족하다”며 문화재청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국보 1호로는 훈민정음 해례본(국호 제70호)이 적합하다”고 발언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 뒤 2008년 숭례문이 화재로 불탔을 때도, 2013년 숭례문 부실 복원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국보 1호 자격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 사이 문화재청이 지정번호를 없애겠다고 했지만 여러 이유로 추진되지 못했다. 

문화재는 선조의 숨결과 정신이 담긴 유산이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동안 매겨진 번호는 서열화를 부추기며 소모적인 논란을 일으켜 왔다. 더군다나 일제가 일방적 기준으로 지정한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가 아직까지 존재해 왔다는 것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심지어 일본도 국보 번호는 정부 관리용일 뿐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지정번호가 폐지되는 것은 어떤 문화재건 그 나름대로의 진면목을 살펴보라는 점을 일깨운다. 이제라도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를 없애기로 한 결단은 다행스런 일이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581호 / 2021년 4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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