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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문경 봉암사 동방장(東方丈)

기자명 법상 스님

시공을 초월한 선사의 마음

태고보우 스님 어록에 실린 가음
대립이 없어진 자리는 곧 수행처
천지와 하나돼 분별은 부질없어

문경 봉암사 동방장(東方丈) / 글씨 해정 김세호(海庭 金世豪).
문경 봉암사 동방장(東方丈) / 글씨 해정 김세호(海庭 金世豪).

吾住此庵吾莫識 深深密密無壅塞
오주차암오막식 심심밀밀무옹새
函盖乾坤沒向背 不住東西與南北
함개건곤몰향배 부주동서여남북
(내가 사는 이 암자는 나도 모르지만 / 깊고도 은밀하되 옹색함은 전혀 없다네. / 건곤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없고 / 동서남북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도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도 문경 봉암사 내 전각 중 한 곳의 주련을 소개하고자 한다. 봉암사 동방장(東方丈)은 방장 스님이 주석하는 장소다. 이 공간은 고려 말기에 수행했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스님의 어록 가운데 ‘태고화상어록’의 ‘태고암가’에 실린 가음의 일부를 주련으로 취하고 있다. 

태고보우 스님의 속성은 홍씨이다. 고려 충렬왕 27년 경기도 양근(현 양평)에서 태어났으며 13세 때 양주 회암사에서 출가를 했다. 1346년 원나라로 들어가 하무산에서 석옥청공(石屋淸珙) 스님의 법을 이어받고 충목왕 4년에 귀국하여 우리나라 임제종(臨濟宗)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 사회는 신돈(辛旽 1323~1371)이 횡포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신돈의 투기에 의해 법주사에 금고되었던 스님은 신돈이 죽은 후에야 고려 제32대 국왕인 우왕의 국사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우왕 8년 양평 용문산 소설암에서 입적했다.

오주는 ‘내가 머무르는 곳’을 말하므로 여기서 오(吾)는 이 시문을 지은 태고보우를 지칭한다. 그리고 막식이라는 표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시문을 보면 분명 자기가 사는 암자라고 하였거늘 다시 이를 거론해 왜 모른다고 하였을까? 이는 마치 선문의 화두처럼 수행자들에게 슬쩍 던진 무거운 질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심은 ‘깊고도 깊다’라는 의미다. 밀밀에서 밀은 ‘빽빽하다’ ‘촘촘하다’는 뜻이지만 이외에도 ‘고요하다’ ‘깊숙하다’ ‘그윽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옹새는 한의학으로 보면 기혈이 순행하는 통로가 어떤 원인에 의해 꽉 막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장소가 비좁지 않다’와 ‘생활이 몹시 군색하다’는 표현이 함께 들어있다. 그러므로 ‘보우 스님의 암자는 옹색함이 전혀 없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함개에서 함은 상자를 말하고 개는 뚜껑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말하는 바가 ‘통’이 무척 크다,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고 덮어씌웠기에 앞뒤를 구분할 수조차도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동서남북 사방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다’고 결론을 말하고 있다.

이 시문을 이해하려면 글만 쫓아갈 것이 아니라 시문의 흐름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 “내가 거주하는 암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나 전혀 옹색함이 없는 암자”라고 했다. 그리고 또다시 말하기를 “천지를 함장했기에 앞뒤를 논할 것이 없으며 그러하기에 사방을 분간할 필요도 없다”라고 했으니 이 시문의 골격은 곧 시공을 초월한 선사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우에게는 서로 맞대거나 버티는 대립이 없다는 것을 이 글은 여실히 보여준다. 대립이 없어진 자리를 해탈, 무가애 등으로 표현하기에 이를 선문에서는 출격장부라고 한다.

시공을 초월해서 보면 천지가 곧 수행하는 자리다. ‘크다’ ‘좁다’라고 하는 대립의 관념이 무너진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옹색함이 없는 것이다. 천지와 더불어 이미 하나가 되었음에 다시 동서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다. 그러므로 이 시문에서는 ‘제일의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582호 / 2021년 4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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