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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엄마 죽음 겪으면서 기도 공덕 절실히 체험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법보신문 사장상 - 정진숙

100일 동안 기도하고 떠난 인도 순례서 큰 사고 났지만 찰과상만
어머니 무덤서 “엄마 딸로 태어나 감사” 참회하자 마음 평온해져
나와 이웃의 평안·행복 발원하는 기도 통해 선한 영향력 퍼져가길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큰 비명이 들렸다. 길 가던 행인들이 사고 난 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오토바이는 나의 옆구리를 세게 치고 쏜살같이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몇 바퀴를 차도에서 구른 후 내동댕이쳐졌다. 그날은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를 다녀오면서 네팔 국경에 들러 반납했던 여권을 찾아야 했다. 국경이어서 그런지 꽉 찬 사람들로 정신없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서로 엉켜 경적까지 울려 대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촉각을 곤두세우며 몇 번이고 확인하며 건넌 길이었다.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어디서 갑자기 그 오토바이가 질주하며 나타났는지. 어쩌면 그 사고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인도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난 이유 없이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안성의 한 절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 점안식이 있었다. 나는 육법 공양팀의 한 명으로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행사가 무사히 마무리되고 신도들은 각자 나름의 소원을 빌며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했다. 문득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백일기도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불자로서 백일기도나 밤샘 기도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100일 동안의 새벽기도는 성지 순례 일주일을 앞두고 끝이 났다. 백일기도를 회향하면서 안전하고 무탈한 인도 성지 순례도 함께 기원했다.

사고 후 온몸이 아팠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엄마도 보고 싶었다. 아무리 준비 없이 가는 것이 죽음이라지만 너무 허망했다. 제발 지금 이 순간이 꿈이기를…. 희미하게 사람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주변에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주변은 온통 희뿌연 먼지와 함께 냄새마저 답답했다. 눈을 떠보니 하늘이 보였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서럽게 눈물이 폭발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이유 없이 들었던 불안한 마음이 이 사고였다고 생각하니 퍼즐 맞추듯 이해가 갔다. 복받쳐 오는 감사함과 안도감에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다행히 팔다리는 멀쩡했다. 스웨터가 조금 찢겨 지고 바지 무릎에 구멍이 크게 나 있었다. 구르면서 바닥에 쓸렸는지 오른쪽 팔꿈치에 핏자국이 엉겨 붙었다. 머리는 먼지투성이에 흡사 재를 뒤집어쓴 듯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걸음에 달려온 스님이 나를 안고 관세음보살을 되뇌며 이만해서 고맙다고 했다. 스님도 많이 놀랐는지 입술이 퍼렇게 질려 있었다. 우리 일행 모두는 아직도 그날의 교통사고를 떠올리며 참으로 내가 많이 다치지 않고 살아난 것이 기적 같은 일이고 잊을 수 없는 부처님의 큰 가피라고 말한다. 그때 알았다. 인도 오기 전 내가 왜 새벽 백일기도를 하고 싶었는지. 그 기도가 내 인생에 어떤 전환점을 주게 되었는지 모두 알게 되었다. 스님과 일행이 나를 부축하며 일단 차가 없는 곳으로 갔다. 이 광경을 쭉 지켜보던 행인들도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뿔뿔이 흩어지며 이방인의 아픔을 위로했다. 스님의 부축을 받고 발을 절룩거리며 버스 안으로 올랐다. 나는 일단 신경 안정제 몇 알을 먹고 얼굴은 눈물이 범벅인 채로 잠들어 버렸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살아있으니 그것으로 천만다행이다. 그 후 나는 약을 먹고 바르면서 며칠 남은 인도 성지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 얼마나 따듯하고 가슴 벅찼던지 그때의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담배 주산지로 유명했던 시골 음성에서 충주로 이사를 나왔다. 광산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사업을 접게 되고 외국산 담배가 들어오면서 하고 계시던 담배 농사도 더는 가망이 없었다. 도시로 이사 나온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직 도시 생활에 적응도 못한 가족에게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은 길 잃은 양 떼같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방 한 칸이 우리 가족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때부터 엄마의 작은 어깨는 늘 움츠려 있었고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세 남매가 기 안 죽고 잘 자랄 수 있을지 늘 염려했던 것 같다. 엄마와 나의 절 동행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더 잦아졌다. 아마도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고된 삶의 위로와 삼남매를 잘 키워야겠다는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충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내가 초등학교 한 학기를 남겼을 때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그리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온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세 남매를 이렇게 반듯하게 키워 냈으니 아버지가 항상 엄마에게 꽃가마를 태워 줘야 한다고. 엄마는 지금 아버지에게 목에 핏줄이 서게 자식 자랑을 하며 꽃가마 이야기를 하고 계실까?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엄마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며칠 전 냉장고 문을 열다 십여 년 전 척추 수술한 곳에 금이 갔는지 전혀 거동을 못 하셨다. 병원에서는 압박골절 같다며 약 처방과 함께 집에서 요양하라고 했다. 엄마는 그때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 곁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나는 신랑과 애들을 먼저 서울 시댁에 보냈다. 엄마를 돌봐야 해서 올 설 명절은 시어머님께 못 간다고 미리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엄마는 점심을 드시고 낮잠을 주무시러 들어가셨다. 엄마가 일어나시기 전 집안일을 마치고 간식 준비도 해야 했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보니 편히 주무시고 계셨다. 좋아하시는 흑임자죽이 식을까 걱정돼 엄마를 깨우러 다시 들어갔다. 그것이 엄마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주무시기 전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작별 인사란 것을 그땐 몰랐었다. 엄마가 말했다. 혹시 눈앞에서 죽음을 맞아도 너무 소리 내어 슬피 울지 말라고. 막내딸이 밟혀 떠나지 못하니 대신 기도하라고 하셨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엄마 얼굴을 나의 뜨거운 눈물로 녹일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시 엄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렇게 엄마는 설 연휴 하루 전에 94세의 나이로 내 곁을 떠나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내 엄마를 잘 살피지 못한 죄책감에 쌓여 매일을 그리워했다. 조금만 더 일찍 깨웠더라면 엄마가 살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오빠는 엄마를 선산에 있는 아버지 묘에 합장하기를 원했다. 살아생전 부부의 생이 너무 짧아 안타까웠는지 아버지와의 합장묘를 늘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를 저 차가운 땅에 묻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던 엄마에게 못다 한 사랑 많이 주세요. 꽃가마도 태워 주시고 엄마 부탁이면 뭐든 다 들어주세요. 아버지 없이 혼자 눈물로 산 세월 이제는 외롭지 않게 아낌없이 사랑해 주세요.” 스님께서 염불하기 시작했고 나도 애써 눈물을 참으며 따라 했다. 하관이 끝나고 흙을 덮을 무렵 누군가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 꽤 큰 소리라 일제히 그가 가리키는 대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큰 새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오더니 바로 이어서 조금 작은 새 한 마리가 뒤따라왔다. 새 두 마리가 잠시 허공에 머물며 우리를 바라보더니 원을 그리며 몇 바퀴를 돌았다. 난 순간 소리 내어 엄마라고 부를 뻔했다. 작은 새가 바로 내 위에서 멈칫하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하는 듯했다. 

“엄마가 미안하다. 너를 많이 힘들게 해서. 네 잘못 아니니 너무 슬퍼 마라.” 참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고 가슴 한쪽에 박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빠져나간 듯 평온해졌다. 엄마에게 답했다. “엄마! 내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와 함께 극락왕생하셔서 내내 행복하세요. 그동안 엄마 때문에 많이 행복했고 엄마 딸로 태어나 감사했어요.” 한 쌍의 새는 다시 한 번 허공을 돌더니 큰 새를 선두로 사라졌다. 난 알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아직도 자책하며 슬픔에 잠겨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막내딸을 생각해 자유롭게 훨훨 나는 새로 나투시면서까지 위로하러 오신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49재 동안 열심히 기도했다. 

집에 마련한 기도방에서 ‘금강경’ ‘지장경’ ‘아미타경’을 독송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시작한 기도는 지금도 변함없다. 인도에서의 죽을 뻔했던 교통사고와 엄마의 죽음으로 난 알게 되었다. 나의 기도와 엄마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인도 가기 전 백일 동안의 새벽기도가 기적처럼 나를 살린 것이었다면 자식에게 큰 아픔 없이 잠자듯이 조용히 가고 싶다며 날마다 부처님께 기도했던 엄마는 소원성취 한 것이다. 엄마 없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습관처럼 했던 기도는 이제 나의 평온함과 정진을 위하는 또 다른 습이 되었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바로 깨우고 세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루를 기도하며 시작한다는 것은 공부할 내용을 예습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몰라도 두렵지 않고 예습한 내용이 있어 편안히 풀릴 내 인생의 단원 아닌가 싶다. 엄마를 만날 때면 나도 엄마에게 꽃가마를 태워 달라고 말하고 싶다. 내 삶의 성적표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기꺼이 태워 줄 것 같다. 가끔은 나의 기도가 내 인생에 나침반이 되어주고 촛불이 되어준다면 내 삶에 더 이상의 버팀목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기도하는 수행자의 삶을 살 것이다. 나의 기도가 나와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이 되어 하루하루가 평안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참다운 불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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