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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제69칙 낙포장교(洛浦藏教)

한 조각 옥은 본래부터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불법 인연 닿기 전 본래 속성
부족함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
단비 필요한 초목은 수행 해당
옥은 반드시 자각 필요한 수행

승이 낙포에게 물었다. “일대장교에도 들어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낙포가 말했다. “단비를 맞으면 세 가지 풀은 자라나지만, 한 조각의 옥은 본래부터 빛이 났다.”

낙포는 취미무학(翠微無學)과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을 참문하고, 마침내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에게 법을 이은 사람으로 풍주(豐州)의 낙포원안(落浦元安)이다. 일대장교(一大藏教)는 팔만대장경을 가리키는데 부처님의 설법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불립문자 교외별전처럼 언설로 표현되지 않는 정법안장을 총칭한다. 이 일대장교의 부처님 가르침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과연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세상의 진리가 모두 담겨있다는데 그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도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묻고 있다. 질문한 승은 불법에 대한 믿음만큼은 이미 제법 갖추어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에 낙포는 비유를 들어 답변한다. 단비를 맞으면 세 가지 풀이 자라난다는 비유는 ‘법화경’ 약초유품의 내용이다. 한 조각의 옥이 본래부터 빛이 났다는 것은 본래사(本來事)는 조작과 시비와 분별 등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일대장교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없지만 시절인연이 도래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단비가 내려도 그것이 풀에 닿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불법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중생에게는 불법의 경우에도 그것이 감로법인 줄 이해하지 못하고 항간의 떠도는 소리로만 느껴진다. 세 가지 풀은 참으로 다종다양한 중생의 근기와 속성은 비유한다. 경‧율‧론(經‧律‧論)의 삼장이기도 하고, 삼계의 중생이기도 하며, 계‧정‧혜(戒‧定‧慧)의 삼학이기도 하고, 문‧사‧수(聞‧思‧修)의 세 가지 지혜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불법의 자양분을 섭취하여 자라나는 풀로서 잎이 나고 가지와 줄기가 뻗으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지극히 자연스러운 법이연(法爾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에 상대하여 한 조각 옥은 본래부터 찬연하게 빛을 내고 있다. 불법의 인연이 닿기 이전부터 본래적인 속성이 그러하다. 새롭게 불법을 들어야 한다든가, 단비를 맞아야 한다든가, 누가 이끌어주어야 한다든가 할 필요도 없이 무엇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무결한 상태이다. 선종에서 말하고 있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의 모습이다.

단비를 맞아야만 자라나는 초목은 자신이 초목으로서 자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비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후자는 단비를 맞아야 한다는 인연이 없어도 자연히 빛을 내고 있는 까닭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은 자신이 빛을 내고 있는 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단비의 인연이 필요한 초목은 타력을 말미암아 성취하는 수행의 경우에 해당하고, 저절로 빛을 내고 있는 한 조각 옥은 자력에 의거하건만 반드시 자각이 필요한 수행의 경우에 해당한다. 일대장교는 그대로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을지라도 정작 그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그저 무용지물이다. 일대장교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여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비를 맞아야 하는 초목처럼 시절인연이 도래해야 하고 한 조각 옥처럼 본래부터 그 공능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일대장교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 불법의 인연을 상징하는 단비와 자각을 상징하는 한 조각 옥의 빛은 다르지 않다. 동등한 입장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마치 인(因)과 연(緣)의 관계와 같다.

낙포의 답변은 순전히 비유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을 이해할 만한 납자라면 더 이상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한 승은 낙포의 답변에 대하여 뭐라고 응수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질문한다면 자신이 맹추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지만, 문답을 그만두었다면 이제부터는 일대장교를 상대하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 된다. 과연 일대장교에 승의 질문까지 들어있는 것인가 아닌가 알아차려야 한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91호 / 2021년 6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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