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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드보르자크의 음악

기자명 김준희

미지의 세계서 교향곡 명작 꽃피운 음악계 선재동자

시골 푸줏간 아들로 태어난 체코 민족주의 대표 음악가
미완의 음악세계로 여겨지던 미국으로 이주 단행한 이후 
슬라브감성·흑인영가 아울러 그만의 음악 언어로 재탄생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도축자로서의 인생을 거부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고향을 떠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창작열을 불태운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땅 미국에서 새로운 음악세계의 꽃을 피운다.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도축자로서의 인생을 거부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고향을 떠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창작열을 불태운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땅 미국에서 새로운 음악세계의 꽃을 피운다.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를 대표하는 음악가이다. 드보르자크는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푸줏간과 여관을 운영하는 집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도축업을 하면서도 치터(골무로 현을 뜯는 작은 하프와 같은 동부 유럽의 민속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던 드보르자크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아들에게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줄 생각도 있었는지 도축 자격증을 따도록 했다.

어려서부터 예술가적 기질이 충분했던 드보르자크는 도축자로서의 인생을 거부하고 음악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즐로니체로의 유학생활을 거쳐 1857년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했다. 오르간 연주뿐만 아니라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 화성법, 대위법을 비롯한 작곡기법도 충실하게 배운 드보르자크는 이 시절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배우며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구축해 갔다. 체코의 수도였던 프라하에서는 리스트와 클라라 슈만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수시로 연주회를 열었으며, 드보르자크는 이런 공연들을 포함하여 대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적 혜택을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차석 졸업이라는 훌륭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로서의 활동은 여의치 않았다. 그는 1862년부터 국민극장의 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중상류층 자제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기도 했다. 그는 선배 작곡가인 스메타나의 민족 오페라와 바그너나 리스트의 작품들을 연주하며 창작 욕구를 불태웠다. 1873년 프라하의 한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하며 그는 안정을 찾아갔고, 작곡을 할 여유도 생겼다. 드보르자크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였다. 

드보르자크는 1875년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금 시험에서 심사위원이었던 평론가 한슬릭과 브람스의 인정을 받아 유럽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브람스의 추천으로 ‘슬라브 무곡’의 의뢰를 받게 되고 1878년 완성된 이 곡은 그에게 큰 유명세를 갖게 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드보르자크 특유의 독창적인 슬라브적인 감성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위 사진은 드보르자크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준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의 칠필악보.
위 사진은 드보르자크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준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의 칠필악보.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은 해외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영국에서 최고의 반응을 보였다. 드보르자크는 이후 1884년부터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자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사이 사랑하는 자녀 셋을 모두 잃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고, 주력하고 싶었던 오페라의 성적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드보르자크는 교향곡과 실내악곡을 작곡하며 활동을 이어갔고 독자적인 형식의 피아노 트리오 Op.90 ‘둠키’를 작곡하며 슬라브적인 색채 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이듬해부터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에 묶여 있어 작곡가로서의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자율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교수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했기 때문에, 훗날 드보르자크의 독특한 수업 방식이 작곡가로서 자립심을 키우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회고하는 작곡가들조차 당시에는 그의 수업을 힘들어했다.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음악원에서의 경력과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미국에서 초청을 받게 된다. 1892년 미국 내셔널 음악원이 그에게 제시한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프라하 음악원보다 스무 배 이상의 연봉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1년에 10회의 연주회 제공, 방학과 휴식을 보장하는 등 드보르자크로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1892년 당시 미국의 음악계는 미지의 땅이자 미완의 세계였다.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신세계’였기 때문에 드보르자크는 프라하를 떠날 결심을 했다. 결과적으로 드보르자크의 미국행은 그의 음악 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고, 미국 음악계 전체로 보아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드보르자크는 그해 미국 내셔널 음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하고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미국에서 그의 첫 음악회는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였고, ‘두 개의 신세계-콜럼버스가 발견한 신세계가 음악의 신세계를 발견하다’라는 축사로 음악회는 시작되었다. 

주 3회 작곡 강의와 2회의 음악원 오케스트라 지휘, 그리고 작곡에 몰두할 수 있는 뉴욕의 환경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에게는 흑인영가의 감성도 결코 낯설지 않았다. 그의 몸에 흐르고 있는 슬라브인의 피는 흑인영가의 감성도 소화하기에 충분했고, 그만의 음악 언어로 탄생될 수 있었다. 

1893년 작곡된 교향곡 9번 E단조, Op.95 ‘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자크에게 대중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단 한 곡의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19세기 교향곡 중 초연 이후 단 한 순간도 오케스트라의 고정적인 레퍼토리에서 빠진 적이 없다. 또한 고전음악 전체를 통틀어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과 더불어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적이면도 보헤미안적인 이 작품에는 드보르자크의 개인적인 감성, 자신에게 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답례, 그리고 고국을 향한 향수가 모두 담겨있다.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의 성공 이후 현악사중주 ‘아메리카’, 첼로협주곡 b단조 등의 명작이 탄생했다. 

드보르자크의 음악 여정은 마치 선재동자가 떠나는 구도의 길을 떠올리게 한다.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의 두 번째 악장을 들으며 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난 선재동자의 발원을 느껴보면 어떨까. 프라하 음악원에 취업하기 전까지 불안정한 삶이 계속되었고 그에게 큰 유명세를 안겨준 ‘슬라브 무곡’으로부터 미국에서의 성공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교향곡 ‘신세계로부터’나 현악사중주 ‘아메리카’ 그리고 첼로협주곡은 음악이 가진 힘으로 쉼 없이 정진해왔던 드보르자크의 긴 여정의 훌륭한 종착지가 되었다. 여타의 작곡가들과는 달리 소박하고 진솔한 감성을 담은 친근한 작품을 통해 문화적으로 소외 되어있던 조국의 음악세계를 널리 알린 드보르자크. 음악인으로서 그의 일생을 선재동자의 구도 여정과 견주어보고 싶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91호 / 2021년 6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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