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제왕 샤카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빤짜시카야. 여래들께서 선정에 들어 명상하실 때에 나와 같은 자가 다가가기란 쉽지 않단다. 그러니 네가 먼저 가서 세존을 기쁘게 해드려라. 네가 세존을 기쁘게 해드린 다음에 내가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를 찾아뵙는 것이 좋겠구나.”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는 벨루와빤두를 연주하며 사랑의 시를 노래 했다.‘존귀한 여인이여, 쑤리야왓차여./존귀한 여인이여, 타오르는 불을 물로 끄듯이/내 사랑의 열병을 꺼주십시오./아름다운 여인이여, 나를 안아주소서./아름다운 눈을 지닌
윤이상(1917~1995)의 ‘플루트 협주곡(1977)’은 북부 독일 휴양지 히차커에서 매년 개최되는 여름 음악 페스티발협회의 의뢰를 받아 작곡된 곡이다. 당시 위촉곡을 연주하기로 예정된 플루티스트는 뛰어난 기교와 빛나는 음색을 가진 칼하인츠 쵤러였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피아니스트로 더 잘 알려진 귄터 바이센보른이었다. 윤이상은 이를 고려하여 독주자의 역량을 더욱 돋보이게, 오케스트라 파트는 작은 관현악 편성으로 단순하게 작곡하였다. 윤이상의 음악세계의 원류는 서양음악과 동아시아 음악이다. 윤이상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잘 자라 잘 자라 노래를 들으며 / 옥같이 어여쁜 우리 아가야 / 귀여운 너 잠 잘 적에 / 하느적 하느적 나비 춤춘다 / 잘 자라 잘 자라 노래를 들으며”우리가 잘 아는 슈베르트의 자장가 D.498의 우리말 가사이다. 슈베르트가 1816년, 19세 때 지은 곡으로, 그의 다른 예술가곡(Lied)과 마찬가지로 독일 서정 시인 클라우디우스의 시에 음악을 붙인 작품이다. 모차르트와 브람스의 자장가와 더불어 어린이들도 쉽게 따라부를 수 있고, 교과서에도 실려있어 동요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어엿한 예술가곡이다. 슈베르트는 가곡에 있
베토벤의 칸타타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112’는 같은 이름의 괴테 시를 합창 음악으로 탄생시킨 곡이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와 혼성 4부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는데, 베토벤이 1812년 괴테를 만난 후 그의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의 시를 탐독한 후에 작곡하게 되었다. 이 곡에는 베토벤의 ‘장르에 대한 갈망’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기악 음악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행보를 보였던 고전주의의 완성자 베토벤이 낭만주의의 중심 장르인 ‘예술가곡(Lied)’을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확장시킨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작품들에는 그의 모든 열정과 꿈이 담겨 있다. 손가락 훈련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후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작곡가로서 성공하고자 했던 슈만은 작곡 활동 초기에 피아노 작품에 온 마음을 쏟았다. 1833년까지는 ‘아베크 변주곡 Op,1’, ‘토카타 Op.7’ 등 비르투오소(virtouso, 연주 기교가 탁월한 연주자)적인 곡들을 주로 썼고, 1838년까지는 피아노 소나타 3곡과 ‘환상곡 Op.17’등 규모가 큰 작품들을 작곡했다.그 중 ‘환상곡 Op.17’은 1836년부터 3년에 걸쳐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슈
“벗이여, 예를 들어 시장이나 대장간에서 가져온 청동 그릇이 깨끗하고 광채가 나더라도 그 안에 뱀이나 개나 인간의 사체를 담아 다른 청동 그릇을 덮어 다시 시장으로 내간다면, 뭔가 귀중한 음식이 담겨있다고 여겨 궁금해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혐오감을 느끼고 불쾌해지고 메스꺼워져서 배가 부른 사람은 물론이고 배가 고팠던 사람들조차 식욕이 달아날 것입니다.(중략) 예를 들어 시장이나 대장간에서 가져온 청동 그릇이 깨끗하고 광채가 나는데 그 안에 맛있는 흰 쌀죽과 여러 가지 국과 반찬을 담아 다른 청동 그릇을 덮어 다시 시장으로 내간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마하판타카 존자가 그의 동생 출라판타카를 불러 “만일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출라판타카는 형 마하판타카의 권유로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는 현명하고 똑똑한 형에 비하여 머리가 좋지 못해 몇 달 동안 시 한 줄 외우지 못할 정도였다. 부처님을 만나고 깨달음의 세계를 알게 된 형 마하판타카는 동생에게도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싶어 그에게 출가를 권했지만, 무능함 때문에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점점 무시를 당하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다. 형
서양음악사에 있어 피아노에 가장 헌신했던 작곡가는 단연 프레데릭 쇼팽이다. 그는 몇 개의 곡을 제외하고는 피아노를 위한 작품만 남겼다. 그가 평생을 피아노라는 악기만을 위해 매진했기 때문에 그의 피아노곡에서는 오케스트라적인 색채나 실내악적인 악상이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쇼팽은 오로지 피아노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음색을 추구했다. 쇼팽은 낭만주의 시대 최초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베토벤 이후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고 독자적이고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하여 소나타, 발라드, 스케
피아노를 배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면 아마 ‘체르니’라는 이름은 한 번 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이엘’ ‘체르니’ ‘하농’ ‘부르크뮐러’와 같은, 우리가 책의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작곡가의 이름들이다. 즉, 편의상 작곡가의 이름을 따서 간단하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초보자들을 위한 다양한 교재들이 등장했지만, 이 작곡가들이 집필한 연습곡집들은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며 지금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피아노를 얼마나 배웠는지 궁금할 때, “체르니 몇 번까지 쳤어?”라는 질문의 주인공이 되는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를 대표하는 음악가이다. 드보르자크는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푸줏간과 여관을 운영하는 집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도축업을 하면서도 치터(골무로 현을 뜯는 작은 하프와 같은 동부 유럽의 민속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던 드보르자크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아들에게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줄 생각도 있었는지 도축 자격증을 따도록 했다.어려서부터 예술가적 기질이 충분했던 드보르자크는 도축자로서의 인생을 거부하고 음악의 길을 걷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우울함과 고독에 쌓여 평생 동안 어두운 감정을 지닌 작곡가에게서 탄생한 서정적인 멜로디와 빈틈없는 구조적 완벽함은 아이러니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발레음악을 비롯해 소품에 이르기까지 전 장르를 통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들이 이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감상자들에게 최고의 몰입도를 자랑한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의 광산을 관리했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균형 잡힌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법률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상
아나율(아루눗다)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를 받던 청년이었다. 부처님의 명성이 고향 카필라성까지 전해지자 석가족의 많은 명문가 청년들이 부처님의 뒤를 잇겠다는 열망으로 서로 출가를 논의하기도 했다. 아나율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밧디야, 아난다, 바구, 캄필라, 데와닷다, 우팔리와 함께 출가를 결심했다.‘금수저’로 태어나 항상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해 왔던 아나율에게 수행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탁발을 비롯해서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했던 그는 출가하기 전
“눈앞의 경계가 마음의 헛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점점 초월하라. 눈앞의 사물은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혹은 자신의 견해대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이다. 고정관념(相)을 깨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대 예술도 어떤 일반적인 편견이나 경향 등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음악 감상자는 현대음악에 대해서 주로 상식을 파괴한 파격성이나 의외성, 또는 추상성을 기대한다.실제로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새로운 음악 발전에 있어 진정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를 회복하기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1936~)는 필립 글래스와 함께 미국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소리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패턴화된 음형을 반복시킴으로서 구성되는 형태를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라이히는 코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는 현대음악의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밀즈 대학에서 루치아노 베리오를 사사했다. 뉴욕으로 그는 돌아와 미니멀리즘 미술가들과 교류를 하며 주로 갤러리에서 연주회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84년 3월 다른 작곡가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편성의 실내악곡을 작곡했다. 피아노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5중주 Eb장조, K.452이다. 이 독자적인 악기 구성은 단순히 관악 앙상블에 피아노를 추가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악기들의 음색들을 한데 모으기도 하고 동시에 각 악기가 개별적으로 돋보일 수 있도록 피아노를 중심으로 유기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피아노가 관악기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며 실내악적인 음색들의 악기들에게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고, 각각의
불교에서 가장 큰 명절은 단연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이다. 고타마라는 한 인물의 탄생을 기념하는 부처님오신날은 모든 불자들에게 가장 큰 의미를 주는 날이다. 출가재일은 수행자로의 삶으로 내딛는 두 번째 탄생을 뜻하는 날이다. 싯닷타 태자가 왕궁을 떠나 주어진 모든 현실을 버리고 더 나은 것을 위한 선택, ‘위대한 포기’를 결심한 역사적인 날은 또 다른 의미의 탄생이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부처님오신날이다. 성도재일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탄생일이다. 진정한 의미의 ‘깨달은 자, 붓다’의 탄생이야말로 새로운 의미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이 부처님을 의왕(醫王)에 비유한 내용이 나온다. “마치 뛰어난 의술을 지닌 어떤 의왕이 병자를 보기만 해도 모든 병이 치유되듯이, 비록 죽을 목숨이지만 몸에 약을 발라, 그 몸의 작용을 병이 있기 전과 같이 하네. 가장 뛰어난 의왕 역시 이와 같아, 모든 방편과 일체지를 구족하여, 예전의 묘행(妙行)으로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중생들을 보기만 해도 중생들의 번뇌가 없어지네.(‘대방광불화엄경’ 여래출현품1)”훌륭한 의사가 의술로써 환자를 치료하듯, 부처님은 번뇌에 빠진 사람들을 방편과 지혜로 치료하셨다. 환자
서양 음악사에서 1685년은 상당히 중요한 해로 여겨진다. 바로크 시대 음악의 중심이 되는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게오르그 헨델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로크의 또 한 명 주요 작곡가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역시 바흐와 헨델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스카를라티는 ‘근대 건반악기 주법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바로크 시대의 대표 작곡가인 동시에 훌륭한 하프시코드(Harpsichord, 피아노가 상용화되기 이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건반악기로 건반을 누르면 플렉트럼이 현을 뜯어 소리를 낸다) 연주자였다. 나폴리에서 태어
프란츠 슈베르트는 자신의 가곡(Lied) 네 곡의 선율을 기악곡에 사용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탄탄한 구성미를 자랑하는 작품이 ‘방랑자 환상곡’ C장조 D.760이다. 1820년 무렵의 청년 슈베르트는 규모가 큰 관현악곡을 작곡하고자 했었다. 이 곡은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에서 느껴지는 깊고 웅장한 음색과 함께 교향곡적인 구조가 돋보인다. 또한 이 곡에는 청년 슈베르트의 원대한 꿈과 희망이 담겨있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이 곡이 출판될 1823년에는 상당히 몸이 약해져 있었고 이후 항상 병고에 시달렸다. ‘방
요하네스 브람스는 1853년 슈만과 클라라를 만나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번, Op.1을 연주했다. 그의 연주를 들은 슈만은 ‘신인(神人)과 미(美)의 여신 세 명이 지켜보았다’라는 평론으로 스무 살의 청년을 극찬했다. 신중하고도 진지했던 청년 브람스는 평소 존경하던 선배 음악가의 찬사에 ‘제 능력 이상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발표할 작품들에 상당히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브람스는 그의 첫 피아노 협주곡을 1854년부터 4년여에 걸쳐 작곡했다. 원래 교향곡을 작곡하려던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