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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연재를 마치며(끝)

기자명 김준희

불교·클래식음악 만남은 중도의 또 다른 구현

사랑의 열병을 깨달음 열망으로 승화시킨 찬빤짜시카처럼
악기 줄의 팽팽함과 느슨함 사이 최적의 균형 찾아가듯이
불자의 정체성이 클래식 음악과 충돌되는 지점 전혀 없어

팔부중상 석탑 면석의 건달바.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석탑 면석의 건달바. 통일신라시대.

신들의 제왕 샤카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빤짜시카야. 여래들께서 선정에 들어 명상하실 때에 나와 같은 자가 다가가기란 쉽지 않단다. 그러니 네가 먼저 가서 세존을 기쁘게 해드려라. 네가 세존을 기쁘게 해드린 다음에 내가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를 찾아뵙는 것이 좋겠구나.”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는 벨루와빤두를 연주하며 사랑의 시를 노래 했다.

‘존귀한 여인이여, 쑤리야왓차여./존귀한 여인이여, 타오르는 불을 물로 끄듯이/내 사랑의 열병을 꺼주십시오./아름다운 여인이여, 나를 안아주소서./아름다운 눈을 지닌 여인이여, 나를 안아주소서./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거룩한 아라한들에게/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면 그대와 함께 그 과보를 누리게 되기를./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 둥근 대지 위에서/내가 지은 공덕이 있다면 그대와 함께 그 과보를 누리게 되기를. 샤카족의 아들인 성자께서 선정을 통해 일념을 성취하고/현명한 지혜로 사유하여 사띠를 확립하고 죽지 않는 ‘불사’를 구하듯/쑤리야왓차여, 나는 그대를 찾아다닙니다./성자께서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고 기뻐하듯/선한 여인이여, 나 또한 그대와 하나 되어 기뻐할 것입니다./만약 삼십삼천의 제왕인 샤카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면/존귀한 여인이여, 나는 오직 그대 하나만을 원하리니 이처럼 나의 사랑은 견고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빤짜시카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시고 “노랫소리와 음악이 참으로 잘 어우러져 있다. 그대의 악기 소리는 노래 소리를 벗어나지 않고, 노래 소리는 악기 소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대는 언제 이처럼 부처님을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아라한을 칭송하는 사랑의 게송을 지었는가?”라고 칭찬하셨다. 

빤짜시카가 노래한 이 시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를 넘어, 보다 높은 정신적인 평화와 휴식을 이야기하며, 부처님과 아라한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빤짜시카가 마음을 빼앗긴 쑤리야왓차는 간답바 왕의 딸이다. 간답바는 산스크리트어로는 간다르바, 우리말로는 건달바를 뜻한다. 흔히 떠올리듯 건달이라는, 건실하지 못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무위도식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건달바는 서양에서 말하는 음악의 신인 뮤즈와 같이 천상에서 음악을 관장하는 선신(善神)이다. 

빤짜시카는 사랑의 노래를 통해 식지 않는 열병이 깨달음에 대한 추구와 붓다와 아라한에 대한 찬탄과 귀의로 이어지는 모습을 표현했다. 수리야왓차는 빤짜시카에게 공덕을 나누고 싶은 존재이며, 깨달음의 길에 같이 하고픈 존재였다. 에로스적인 사랑이 플라토닉적인 사랑으로 승화되며, 한 차원 높은 종교적 귀의로 이어지며 자기 초월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가니까야’의 빤짜시카의 노래 이외에도 ‘테라가타’에서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부유한 장자의 아들이었던 소나꼴리위사는 온 몸이 황금빛 털로 가득한 자였다. 그는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 감명을 받아 출가하게 되었다. 그는 걷기와 서기 두 자세만 취하며 전력을 다해 명상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곱게 자라 피부가 부드러웠던 그는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상처가 났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곳이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정진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갈등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속세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는데 왜 아무 소득이 없을까? 차라리 환속하여 원래 있던 재산으로 보시하고 공덕을 쌓으면 좋지 않을까?’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부처님은 소나꼴리위사를 찾아와 물으셨다. 

“그대는 속가에 있을 때 비나를 잘 연주했다고 들었다. 그 사실이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 줄을 너무 팽팽하게 한다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악기를 오래 유지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소리도 듣기 좋지 않고, 악기도 오래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줄이 지나치게 느슨하면 어떠한가?” 
“그것 역시 좋지 않습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 줄의 팽팽함이 적당하지 않으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고, 악기도 오래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하다, 소나여.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리의 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의욕이 지나쳐 너무 급하면 초조한 마음이 생기고 열심히 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태만해진다. 노력을 너무 많이 하면 지나치게 흥분하게 된다. 노력을 게을리하면 나태해진다. 그러니 노력과 집중을 균등하게 하여라.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항상 가운데 길로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머지않아 속세의 미혹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소나꼴리위사를 “가장 격렬하게 노력하는 자 중에 제일”이라고 칭찬하셨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소나꼴리위사는 적절하게 수행의 균형을 맞추어 아라한이 되었다. 중도(中道)에 관한 이야기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클래식 음악으로 불교를 풀어갈 생각을 하셨어요?’라고 묻는다. 또는 ‘언제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다. “저는 불자인데요”라고 하면 갸우뚱 하시는 분들이 많다. 클래식 음악과 불교가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멀게 느껴지는 것일까. 필자는 피아노를 처음 만났던 네 살 어느 봄날, 이미 불자였다. 불교와는 문화적 배경이 다른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지만, 나에게 불교는 공기와도 같았고, 한 번도 클래식 음악과 충돌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저는 불자에요(I am a Buddhist.)”라고 했을 때 “두 가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훌륭하다. 내가 아는 피아니스트 중에 가장 멋진 피아니스트임이 분명하다”고 말씀해 주신 유학시절 지도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경전에 나타난 음악과 관련된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3년간의 긴 여정을 마친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613호 / 2021년 12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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