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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제81칙 설봉전좌(雪峰典座)

정진력에다 지혜의 안목 활용까지가 납자 본분

밥을 짓기 위한 쌀 씻기는 일상사
선 입장선 쌀은 정념, 모래는 망념
동산이 설봉에게 쌀 씻기를 묻듯
납자의 선기 개발엔 선지식 필요

설봉은 동산의 문하에서 전좌로 있었다. 쌀을 일고 있는데, 동산이 물었다. “모래를 일어 쌀을 골라내는가, 쌀을 일어 모래를 골라내는가.” 설봉이 말했다. “모래와 쌀을 동시에 골라냅니다.” 동산이 말했다. “그러면 대중은 뭘 먹겠는가.” 이에 설봉은 쌀을 일고 있던 동이를 엎어버렸다. 동산이 말했다. “옳기는 옳다만, 반드시 이후에 다른 사람을 친견해야만 할 것이다.” 과연 이후에 설봉은 덕산의 법을 이었다.

설봉의존(雪峯義存, 822~908)은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에게 인가를 받고 그 법을 이었다. 문답에서 동산은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이고, 전좌(典座)는 선원에서 대중의 공양을 담당하는 직위이다.

본 문답의 핵심은 납자의 본분이란 정진력만이 아니라 지혜의 안목과 그것을 주도면밀하게 널리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자신이 깨치는 행위와 그것을 타인에게 일러주고 보여주는 것은 또 다른 능력이다. 따라서 납자의 수행에서 그 선기의 개발은 일상의 임무에 적재적소의 상황이 필요하듯이 각각에 어울리는 지도를 해주는 선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선종에서 훗날 독특한 가풍의 형성으로 전개되었다.

밥을 짓기 위하여 물이 가득한 동이에 쌀을 넣고 저어서 모래를 골라내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필요하며 일상적인 행위이다. 이것 이외에 특별한 수행이란 없다. 본 문답은 일상사의 일거수일투족이 수행이고 깨침을 상징하는 조사선의 가풍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때가 되어 밥을 짓는다. 마침 공양간을 지나가던 동산이 설봉에게 말을 건넨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밥을 짓느라고 바쁜 줄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기꺼이 묻는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친숙한 행위이면도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답변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래서 질문에 걸맞은 답변을 하기 위하여 애써 노력하는 것은 곧 망상일 뿐이다. 그와는 달리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를 아무런 가감이 없이 그리고 조작도 없이 그대로 답변한다는 것은 쉬운 듯하지만 마냥 쉽지는 않다.

설봉은 지극히 순일한 행위로 일관한 납자였다. 좌선수행으로 일관하느라고 수많은 좌복이 닳아져 없어졌다는 일화 및 전좌의 소임을 자처하여 대중을 위한 공양을 준비한 하심의 수행으로도 유명하다. 설봉은 동산이 질문한 의도를 벌써 알고 있었다. 그래서 쌀과 모래가 다르지 않다는 행위를 보여주는 답변을 통하여 설봉은 쌀과 모래를 동시에 걸러낸다고 응수하고 있다. 쌀이 정념(正念)이라면 모래는 망념(妄念)이다. 정념과 망념을 따로 분류하여 번뇌에 해당하는 모래는 버리고 정념에 해당하는 쌀만 남겨놓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분별적인 잡념이 되고 만다. 이에 동산은 쌀마저도 걸러내고 나면 대중은 먹을 것이 없다고 다그쳤다. 그러자 설봉은 그 질문은 분별심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이 일체를 방하착하고 있다는 의미로 물동이마저 발로 걷어 차버렸다. 설봉 자신은 더 이상 그와 같은 동산의 감변(勘弁)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동산은 무척 흡족해하며 설봉을 찬탄하고, 설봉이 향후에 나아갈 길에 대하여 일러주었다. 그것이 바로 ‘옳기는 옳다’고 인정해주면서도 아직은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된 선기가 필요함을 보완해야 할 것이라고 피력한 것이 소위 다른 선지식을 찾아가라는 권유였다. 주지하듯이 동산의 문하에서는 행지면밀(行持綿密)하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한 가풍을 중시하였다. 땅 깊이 박아 놓은 하나의 말뚝과 같은 뚝심으로 밀고 나아가는 설봉의 정진력은 좋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진력을 제어해줄 수 있는 선지식으로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을 추천한 것이었다. 설봉은 덕산에게 참문하고 그의 사법제자가 되었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603호 / 2021년 10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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