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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법망구 정신 담긴 의승군 위상, 제고돼야”

  • 교학
  • 입력 2021.10.08 20:53
  • 수정 2021.10.10 06:57
  • 호수 1604
  • 댓글 1

불교사회연구소, 10월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회의장서
처영·처능 스님 삶·사상부터 금산사 미륵 신앙까지 심층 조명

조선 의승군 활약은 임진왜란사 전체에서도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선조의 환궁, 평양성 탈환, 청주성 수복, 행주대첩, 노원평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같은 봉기는 왕명이 아닌 승단의 자발적 결단이었다. 이런 가운데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승군을 이끌며 중생구제에 앞장섰던 뇌묵처영 스님 등의 호국 정신을 집중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 스님)가 10월5일 오후 1시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금산사와 호국불교’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는 “처영 스님은 서산휴정 스님의 2대 제자로 인식되고 휴정 4대문파의 문장(門長)이자, 유정 스님 문집의 발문을 지을 만큼 돈독한 관계였으나 처영 스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 “처영 스님의 행장 편찬이나 입비(立碑), 문집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현재 생몰연도 정보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의승활동만이 아니라 승단 보존과 계승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처영 스님 사상이 제대로 조명돼 스님의 위상이 더 적극적으로 선양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처영 스님의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대표 사례로, 김 교수는 ‘행주대첩’을 꼽았다. 스님은 권율(1537~1599)과 대첩을 승전으로 이끌었으나 실상을 묘사한 사료들은 권율 장군의 무용담으로만 부각돼 있어 문제를 느낀다고 전했다. 특히 ‘선조수정실록’에는 승군이 조금 물러나자 권율이 칼로 스님들 목을 베며 전투를 독려했다는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며, “이는 지나치게 권율 편향적인 서술”이라 꼬집었다. 그 근거로는 승군이 배치된  장소를 들었다. 김 교수는 “당시 의승군은 경사가 가장 완만한 산성의 서북면을 담당했는데 경사가 완만하다는 건 적의 공격이 가장 용이하다는 것”이라며 “조련이 잘 된 정예병도 아닌 의승군이 접전 초기지역을 맡았다면 이는 애초부터 무참한 희생을 전제로한 배치”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조건 속에서도 처영 스님은 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조정으로부터 무반 최고 품계인 정3품 상의 당상관에 해당하는 절충장군 직을 받았다”면서 “이후 남원 교룡산성을 수축해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줬고, 교룡산성 축수 전말을 기록했던 신흠(1566~1628)에 따르면 스님은 도의 작용을 일으켜 남에게 이익을 주는 승려(起道用而益他)로 인식됐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처영 스님이 참전 이전엔 ‘뛰어난 학승’이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스님은 그간 의승장 공적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출가사문’으로서도 상당한 자량을 갖췄었다”고 강조하며, 스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유자들의 시문을 소개했다. 당나라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되던 백광훈(1537~1582)은 처영 스님을 지덕을 갖춘 승려인 ‘상인(上人)’으로 표현했고, 16세기 중후반 백광훈과 함께 호남에서 명성을 떨쳤던 문인 임제(1549~1587)과는 사명대사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할만큼 친밀한 사이였다. 

이날 김 교수는 처영 스님의 새로운 행적을 찾아내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는 최근 동국대 불교학술원 아카이브를 활용해 무등산 안심사에서 선조 2년(1569) 간행된 ‘범망경보살계’에서 ‘사경 처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어 “사경승이 높은 소임이 아니고 스님이 유정 스님(1544~1610)과 동연배로 추정되기에 20세 초중반 무렵 동참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어 “처영 스님은 한국전란사 위인으로 칭송되긴 하나 군인이 아니었다”며 “출가사문 신분으로 평생을 산 조선 중기 대표 학승이었고, 이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스님이 파계를 하면서까지 살상의 장으로 뛰어든 호국 정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곡처능(1617~1680) 스님의 ‘간폐석교소’로 17세기 조선불교사와 스님들의 호국·호법정신을 탐색하는 연구도 발표됐다.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현종의 불교탄압 정책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한 ‘간폐석교소’를 분석해 설명했다.

1659년 즉위한 현종은 이듬해 출가를 금지하고 40세 이하 비구니를 모두 환속시켰다. 비구니 사찰 자수원, 인수원을 없앴으며 봉은사와 봉선사를 철폐하려 했다. 또 봉은사와 자수원에 봉안됐던 역대 임금들 위패를 모두 땅에 묻었다. 

‘이단 척결’이 명분이었으나 실질적 목적은 부족한 노동력의 해소였다. 이에 처능 스님은 유가의 이치에 맞는 수사학적 논리로 불교정책의 부당함을 비판했다. 국왕의 불교탄압 명분을 6가지로 분류한 후, “불교가 나라 안위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 원당이 종묘역할을 하며, 승려는 국가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왕조 안위와 태평 성대 실현을 위해서라도 비합리적 탄압을 중지하라고 했다. 당시 불교계는 처능 스님의 상소문으로 봉선사·봉은사 철폐를 면할 수 있었다.

오 교수는 처능 스님의 상소가 가능했던 이유가 당시 조선사회에 기여했던 승가 역할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또 스님이 조선조 최고 명문장으로 평가받는 ‘간폐석교소’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벽암각성 스님에게 선과 교학을 배우고,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으로부터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시를 두루 익혔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뇌묵처영 스님이 출가하고, 백곡처능 스님이 입적한 호남수사찰 ‘금산사’를 호국종찰로 조성하기 위해서 의승장 제향과 현창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양은용 원광대 명예교수는 “금산사는 호남수사찰이자 호국종찰로서 면모를 충분히 갖췄으나, 호국불교 성지로 만들기 위한 역사기록과 추모활동은 미흡하다”면서 “다만 2016년 개관한 처영문화기념관이 있어 다행스러운 상황이다. 기념관을 중심으로 의승군에 대한 제향, 현창사업, 학술연구, 자료집적, 콘텐츠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방룡 충남대 교수는 ‘금산사의 미륵신앙과 호국애민 정신’을 발표해, 고대 전북지역의 용왕신앙부터 삼국, 고려, 조선, 근현대사 미륵신앙의 변천을 살폈다. 김 교수는 “현재의 조계종 종지종풍과 앞선 역사가 어우러지는 금산사 만의 미륵신앙을 찾아야 한다”고 전했다.

백곡처능 스님의 연구로 학위논문과 단행본을 내기도 했던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이날 학술대회에 참석해 “국가의 위기상황이었던 조선시대, 민족 공동체를 위해 앞장섰던 호국 의승의 헌신과 금산사의 역할을 재조명하게 돼 뜻 깊다”며 학술대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애써준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04호 / 2021년 10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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