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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제83칙 흥화군기(興化軍旗)

일상적 삶이 소중한 수행이고 깨달음의 실천

자기 살림살이 내보인 납자에겐
어떠한 답이라도 그 가치가 충분
흥화 스님은 납자 마음을 꿰뚫고
밥 먹는 일상행위로 가르침 전해

승이 흥화에게 물었다. “군기(軍旗)가 다급한 경우에는 어찌해야 합니까.” 흥화가 말했다. “매일 반 근의 밥을 먹으면 그만이다.”

흥화존장(興化存奘)은 임제의 법을 잇고, 동문인 삼성혜연(三聖慧然)을 참문하기도 하였다. 후에 위부(魏府)의 흥화사(興化寺)에 주석하였다. 군기(軍旗)가 다급하다는 것은 가장 급선무를 의미한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납자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초발심으로 출가하던 때를 잊지 않고 출가의 본분사를 완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터득하고 불조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여 이 땅에 불법을 주지(住持)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동포의 은혜와 시주의 은혜와 국가의 은혜와 선지식의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군기의 다급을 주제로 질문을 한 승은 실은 자신의 본분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묻고 있다. 지금까지 출가하여 변변하게 깨침을 체득하지 못한 자신에게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를 흥화존장한테 듣고 싶어 한 것이다. 전쟁에서 군의 깃발은 전진과 후퇴의 승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깃발을 빼앗기지 않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 또는 성벽에 높이 내거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를 의미한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는 경우에 납자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속세의 집을 나와서 수행을 한답시고 제방을 유행(遊行)하고, 수많은 선객들과 법거량(法擧量)을 하며, 두타행(頭陀行)을 경험했으면서도, 도무지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 임제종 제이세 흥화존장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살림살이를 숨김없이 내보여준 것이다. 제 딴에는 어느 때보다도 무슨 참으로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선지식의 고귀한 답변을 잔뜩 기대하면서 물었다. 왜냐하면 선지식에게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간담을 내보이면서 제기한 질문이라면, 설마하니 답변을 듣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본전은 찾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와 같은 승의 태도를 파악하고 있던 흥화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일상의 행위에서 끌어내어 ‘매일 반 근의 밥을 먹으면 그만이다’고 답변해준다. 반 근은 여덟 냥[八两]과 같은 의미이다. 이것은 본래 도토리 키재기처럼 도긴개긴이라는 의미로 그다지 긍정적인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흥화가 여기에서 제시한 답변은 전혀 반대의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와 같이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는 승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흥화의 답변은 제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밥은 먹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밥을 먹는 것은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제일의 업무이다. 이보다 더 다급한 일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매일 반 근의 밥이라면 일상의 식사에서 참으로 소박한 밥상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이라도 매일 먹는다는 것은 지극히 소중한 수행이다. 따라서 군의 깃발이 다급한 것처럼 전쟁에서 자신의 머리를 내어줄 것인가, 아니면 남의 머리를 취할 것인가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은 매일 먹어야 하는 반 근의 밥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승은 흥화의 말을 들은 찰나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지금까지 제방을 편력하면서 무엇을 찾아 그토록 헤맸던 것인가. 알고 보니 제자리에서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는 것, 그 이상의 중요한 수행이란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매일 데면데면하지만 아무런 불상사가 없이 지내고 있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이 바로 참으로 소중한 수행이고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을 깨우친 순간이었다. 군기의 다급한 것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다급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매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면서, 우물가의 두레박처럼 반복되는 가운데서 바로 그러한 줄을 자각하는 것은 생사를 해결하는 가장 다급한 길임을 일깨워준 답변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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