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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김영기의 ‘울긋 불긋’

기자명 신현득

봄은 남쪽에서 가을은 북에서 오는
계절의 슬기로 통일염원 밝힌 동시

남쪽 한라산 봄꽃으로 물들면
북쪽 금강산도 봄꽃으로 치장
남쪽 들판 누런 빛깔로 익음도
가을이란 계절 휴전선 넘은 덕

봄은 남으로부터 오고, 가을은 북에서 온다. 시인의 생각에는 4계절이 인간이 그어놓은 휴전선을 넘어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고 보니 계절이 인간이 다니지 못하는 휴전선을 넘어 다닌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다. 

한라산에서 시작된 봄이라는 계절은 하나의 논밭도 놓치지 않고 싹을 틔우고, 한 포기의 초목도 놓치지 않고 꽃을 피운다. 마을과 들과 산봉우리를 세면서 북을 향해 달린다. 휴전선을 훌쩍 넘어 백두산에 이르면 풀과 나무를 한 포기 놓치지 않고 꽃을 피워서 백두산의 봄을 꽃밭으로 만든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80년 가까운 시간을 삼팔선과 휴전선으로 남쪽, 북쪽을 갈라놓고 있다. 만일에 계절까지 휴전선을 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계절도 휴전선을 넘을 수 없다”하고 계절이 휴전선을 넘으려 않는다면 큰일 날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한라산에서 시작된 봄이 호남평야‧경기평야‧황해도 연백평야, 대동강을 지나 백두산 쪽으로 전달되지는 못할 것이다. 봄맞이를 못한 휴전선 북쪽은 꽁꽁 언 겨울에 갇혀 지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백두산에서 시작된 가을이 휴전선을 넘지 못하면 남쪽 나라는 가을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익은 사과 맛도, 익은 감 맛도, 배 맛도, 포도 맛도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논밭 곡식은 익지 못할 것이며, 가을걷이를 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계절은 슬기가 있다. “못난이 인간들은 할 수 없군. 이 경계선은 뭣 하러 그어 놨지?”하고 휴전선을 넘어 다니고 있다. 우리들 인간에게는 휴전선을 넘어 다니는 계절이 그럴 수 없이 고마운 것이다. 통일염원을 내세운 동시 한 편에서 계절의 슬기를 살펴볼까?      

울긋불긋 / 김영기

한라산 물들면 
금강산도 물든다.
휴전선 철조망도 
덩달아 울긋불긋.
철쭉이 
삼천리 강산을 
하나로 물들인다.

백두산 물들면 
설악산도 빨갛다.
삼팔선이 대수야?
훌쩍 넘어 울긋불긋
단풍이 
한라산까지 
하나로 물들인다.  

김영기 동시집 ‘달팽이 우주 통신’(2021)에서. 

남쪽 한라산이 봄꽃으로 물들면 금강산도 봄꽃으로 물든다고 노래하고 있다. 한라산이 붉은 철쭉으로 물들면 금강산도 철쭉으로 물이 든다는 것이다. 그 중간에 놓인 휴전선 철조망도 덩달아 철쭉꽃 빛깔이 된다는 것이다. 봄꽃으로 일찍 등장하는 것이 진달래와 개나리다. 이 시에서 진달래‧개나리를 두고 철쭉을 내세운 것은 철쭉꽃이 더 짙고 꽃도 크고 이미지가 강해서인 것 같다. 더 튼튼하고 힘찬 통일염원의 시를 빚겠다는 시인의 뜻일 것이다.    

지금은 단풍의 계절이다. 이 단풍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휴전선 넘어, 설악산‧삼각산‧지리산 지나, 바다 건너서 한라산을 빨간 단풍으로 물들인다. 제주도 큰 섬이 빨간 단풍 세상이 된다. “삼팔선이 대수인가?”하는 표현은 계절 앞에는 휴전선이 대수롭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이 겁내는 휴전선이지만 계절은 이를 겁내지 않고 훌쩍 넘어온 것이다.   

가을이란 계절이 휴전선을 넘어주었기 때문에 남쪽 나라 온 들판이 누런 빛깔로 익는다. 벼도 익고, 수수도 옥수수도 익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감도 빨갛게 익는다. 배는 노란빛깔로 익는다. 포도는 검은 빛깔로 익는다. 과일마다 씨가 여물고 단맛이 든다. 가을이란 계절이 백두산에서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가.   

시의 작자 김영기(金英機) 시인은 제주도 제주시 출신이다. 아동문예 신인상으로 등단(1984)하여, ‘날개의 꿈’ 등 여러 권의 동시집과 동시조집, 시조시집을 펴내었으며, 한국 동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신현득 아동문학가·시인 shinhd7028@hanmail.net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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