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는 사랑 그 자체였다. 사랑이 끝나면 삶도 끝나는 줄 알았던 시절. 이루어지면 이루어지는 대로, 못 이루어지면 못 이루어지는 대로 사랑은 유형무형의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다. 사랑의 상처를 ‘화상’에 비교하는 것은 꽤 적절하다. 뜨겁기도 하지만, 사랑의 상처는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가다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샅샅이 알고 싶고 항상 껴안고 싶은 마음. 그 간절함은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사강은 그 기쁨과 고통을 잘 아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사랑의 다양한 양상을, 그 절절함을 피부에 닿듯 그려낸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년이라고 해 두죠.”
꽤 발랄한 어조이기는 하지만, 사강의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상’을 떠오르게 한다. 부처님은 감정도, 감각도, 생각도 내가 아님을 오랫동안 공들여 가르쳐주셨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가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더더욱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은 나름대로 사랑의 영원성을 추구한다. 인테리어 전문가인 서른아홉 살의 폴은 로제와 연애중이다. 둘은 오래 된 연인이지만, 로제는 자유의 이름으로 폴을 방치한다. 아직 자신이 청춘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여자를 만나 짧은 열애를 할 가능성을 열어둔 로제는, 폴을 사랑하지만 폴에게 묶이기는 싫다. 폴은 그 ‘자유’가 버겁다. 외롭고 지쳤다. 하염없이 로제를 기다리고, 언제든 로제가 전화하거나 집에 올 경우에 대비하고 있는 앙상한 삶.
시몽은 폴보다 열네 살 어리다. 스물다섯의 그는 어느날 한눈에 폴에게 반해버리고 만다. 그는 폴이 로제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로제가 폴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시몽은 열정 그 자체다. 일도 인간관계도 시들했던 그는 폴을 만나 그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다. 폴을 만난 후, 폴이 없는 자신의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고 믿어버린다. 그는 온통 뜨겁고 어른스러운 사랑으로 폴을 감싼다. 폴의 상처를 자신이 치유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폴의 마음은 복잡하다. 로제를 사랑하지만 로제는 또 다른 여자와 짧고 격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폴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기다려줄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기에는 폴의 마음은 이미 나달나달하다. 그 사이에 다가온 시몽의 사랑은 너무나 뜨겁고 또한 너무나 안온하다. 시몽을 밀어내면서 또한 격하게 시몽을 원하는 폴. 둘은 연인이 되지만, 폴은 여전히 로제를 사랑한다. 한눈팔던 로제가 돌아오기를 은연중에 기다린다.
이 소설을 쓸 때 사강은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이 복잡한 사랑의 결을 어떻게 알았을까. 독점하고 싶지만 구속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도망가고 싶은 동시에 갈구하는 마음. 안될 것을 알지만 포기할 수 없는 마음. 그 마음들이 겹치고 겹쳐서 이루어내는 무늬가 애잔하다.
결국 누구도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은 사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사강도 알고 부처님도 알고 우리도 이제는 안다. 사랑할 때는 사랑 그 자체였던 시절의 나. 사랑이 끝났을 때 나는 이미 한번 죽어버렸다고 중얼거리던 젊은 시절의 내게, 이제 알게 된 진리를 말해주고 싶다. “거룩한 제자는 이와같이 번뇌를 알고, 번뇌의 쌓임을 알고, 번뇌의 소멸을 알고,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탐하는 성향을 버리고 화내는 성향을 없앤 후에 ‘내가 있다’라는 무의식적인 아견과 아만을 제거한 다음,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드러내어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맛지마니까야-정견 경’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612호 / 2021년 12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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