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고, 시작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 시작도 끝도 없다지만, 매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의식을 치르며 우리는 대나무처럼 단단한 매듭을 하나씩 만들어간다. 올해는 대선도 겹쳐 연말의 들썩임이 한층 더한 느낌이다. 이런 시간은 꼭 필요하다. 나 자신을 가다듬고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 이 시간을 얼마나 잘 치러냈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원칙은 간명하다. 생활은 단순하고 몸과 마음은 고요한가. 짚어보면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이 무엇인지 보인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가. 그
한때 우리는 사랑 그 자체였다. 사랑이 끝나면 삶도 끝나는 줄 알았던 시절. 이루어지면 이루어지는 대로, 못 이루어지면 못 이루어지는 대로 사랑은 유형무형의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다. 사랑의 상처를 ‘화상’에 비교하는 것은 꽤 적절하다. 뜨겁기도 하지만, 사랑의 상처는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가다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샅샅이 알고 싶고 항상 껴안고 싶은 마음. 그 간절함은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사강은 그 기쁨과 고통을 잘 아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사랑의 다양한 양상을, 그 절절함을 피부에 닿듯 그려낸다. 그럴 수 있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 해야 할 일은 넘치고, 하고 싶은 일을 벌일 여유는 빠듯하다. 정신 차리고 돌아보면 하루, 한 달, 한 해가 쑥쑥 지나가고 정신 차리고 고개 들어보면 어느 사이엔가 계절을 건너 인생의 한 시절이 사라지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술술 새나가는 느낌은 비유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하다. 시간을 돈처럼 불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효율적 시간관리, 시테크 기술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부처님의 생각은 명료했다. ‘맛지마니까야’의 ‘지복한 하룻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이
부처님 덕분에, 나의 시야는 활짝 열렸다. 사실 부처님을 몰라도 살면서 시야는 조금씩 더 넓어진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랑하는 존재들이 많아지면 자기중심적인 시야도 더 입체적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소외되어 있거나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 서게 되며, 인간이 아닌 생명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충분하여 생길 수밖에 없는 사각지대를 부처님은 남김없이 열어 보이셨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통찰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진
혼자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아무리 외톨이라도 완벽하게 타인과 단절된 삶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정은 어떨까. 우정 없이 살 수 있을까. 극단적인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우정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견딜만하게 해준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이 책은 여운이 남는 그림과 간결한 문장으로 우정의 풍경을 보여준다. 책 속의 ‘우리’들은 늘 함께 있다. 좋은 순간도 많았지만 때로는 적이 되어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난감한 순간을 함께 넘으며, 어떨 때는 멀어지기도 하고, 잊었다 싶은 순간에 다시 만나면
마크 트웨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왕자와 거지’를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돌아다니는 그의 농담을 피하기는 어렵다. 담배를 끊어보려 했던 사람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농담인 “담배처럼 끊기 쉬운 것은 없다. 나는 백번도 넘게 끊었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말은 위트와 아이러니가 무엇인지 한눈에 명쾌하게 보여준다. 그런 그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상상한다면 어떤 얘기를 할까. 그의 작품 ‘아담과 이브의 일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들의 일기
뇌과학자가 뇌졸중을 겪으면 어떻게 될까? 신경해부학을 전공한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자신이 뇌졸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자 “우아, 이거 멋진데!”라며 황홀해한다. “자신의 뇌 기능을 연구하고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진 과학자들이 얼마나 될까?” 병은 누구에게나 시련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병을 뇌를 이해하는 특별한 수업으로 삼았다. 덕분에 우리 또한 뇌의 비밀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그는 자신이 겪은 과정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풀어 적는다. 그가 묘사한 세계는 놀랍도록 아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시간을 잃어버리고, 기억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 생겨난 것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잃는 것에 단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잃는 고통이 단련한다고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던가. 부처님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새롭게 고통스럽고 새롭게 슬프다.이 책을 쓴 브룩 노엘과 패멀라 D 블레어는 둘 다 아주 가까운 이를 급작스럽게 잃은 경험이 있다. 그들은 기나긴 슬픔
얼마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임종의 순간이 가까웠을 때 불필요한 의료적 처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명을 미리 해두는 것이다. 판단이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지금 미리 판단해두는 것은 필요하다. 죽음은 외면하고 있을 때에야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죽음도 예의바른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올 것이다. 안락사는 팽팽한 논란의 주제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면 언제 죽는 것이 가장 최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만약 판단한다면 기준은 무엇이 될까? 우리
여름에는 역시 ‘기담’이다. 기이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읽다보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더위는 한발 물러선다. 기담이 무서운 이유는 괴물이나 귀신같은 정체모를 존재들이 출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밝고 따스한 인간세계의 뒷면은 으스스하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감춘 이유가 있기 마련. 욕망과 원한이 소용돌이쳐서 만들어낸 세계가 기담의 배경을 이룬다. 이 책은 길치인 여행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심부름꾼 미미히코의 이상한 여행기다. 그들은 길을 잃을 때마다 수상쩍은 마을에 도착한다. 이중 하나의 에피소드인
나이가 들면 꽃 사진을 찍게 된다지만, 나이 탓 만이겠는가. 꽃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동적으로 사람을 제 앞으로 데려다놓는 힘이 있다. 정교한 꽃잎과 화려한 색, 거기에 향기까지 더하면 누가 꽃을 이길 것인가. 꽃 앞에 서면 이기고 지려는 마음도 스러진다. 존재만으로도 고마울 밖에. 장 프랑수아 샤바가 쓴 짧은 글 세 편에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덧붙인 이 아름다운 책은 G.W 게스만이 1899년에 쓴 ‘꽃의 언어’에 나온 꽃말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꽃말은 오래 전부터 꽃을 받는 사람에게 은근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으로 널
외로움은 모든 병의 근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법을 모르는 사람도 다른 존재들과 단절된 채 살 수는 없다는 것은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없는 이들은 물기 없는 나무처럼 꼬들꼬들 말라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친절해야 한다. 그들 또한 나처럼 외로우며 아픈 이들이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은 이름이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이의 이름이다. 태어나자마자 무책임한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에게 버려져 간신히 생존하며 혼자서 말과 글과 감정을 배워야 했던 괴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민
현대사회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과거에 비해 인류의 역사가 발전되어 왔음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발전해왔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크다. 우매한 대중들이 먹고살기에 바쁜 와중에 몇몇 천재들이 나타나 한 단계씩 끌어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류의 에너지가 거대하고 역동적으로 흐르는 가운데 몇몇 천재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천재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전의 ‘위인전’들은 천재의 업적에만 관심을 기울여왔다.
“마크 트웨인을 잇는 20세기 미국 최고의 유머작가, 만화가”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은 제임스 서버는 공상의 전문가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빌헬름텔 놀이를 하다가 화살을 눈에 맞아 한쪽 눈을 실명한 그는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가 이후 신문사에서 기자로 재직하며 그림을 그리고 뮤지컬 대본을 쓰고 단편소설을 쓴 바탕에는 그가 공상으로 만든 세계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한편 어딘가 어둡고 아이러니한 세계가. 그가 완벽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이것은 나의 이야기. ‘나’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나는 산 아래 골짜기에서 산다. 자라는 동안 나는 산꼭대기의 신비로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마을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마을을 찾아 올라가지만,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안개로 덮이거나 바위에 가려져 순식간에 없어진다. 그 신비로운 마을을 찾기 위해 나는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러다 문득 길을 잃었구나 싶었을 때, 작은 돌 하나를 발견한다. 그 돌은 신비로운 마을에 사는 이들의 신호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자신의 마을에 간다. 그 마을에서 함께 지내지만,
SF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가상하여 그린 소설”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보통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한다. 그러나 SF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 무엇을 SF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읽으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SF와 ‘-nal(-적인)’의 합성어인 [SFnal]은 굳이 번역하자면 “SF적인”일 것이나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지향하는 바를 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탁월한 SF전문편집자가
남자는 환희에 차서 부인에게 말한다. “드디어 은퇴야! 이제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어.” 평생 동안 직장에 인생을 담보 잡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매일매일 쳐내듯 하며 살아온 그는 드디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본다. 이제 비로소 삶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부인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 “이제 여행도 갈 수 있어! 어디로든 떠날까?” 하자 부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지금? 봄에 가자.”남편의 어떤 근사한 제안도 부인을 함께 들뜨게 하지 못한다. “그럼 같이 외국어나 배울까
나는 언제부터 ‘나’일까? 붉고 작은 몸을 가지고 태를 빠져나왔을 때부터 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알 수 있다. ‘나’라는 개념은 몸이 태어나고도 한참 후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항상 나인 건 아니었다. 내가 되기 전까지, 난 내 안에 없었다.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곳, 나를 제외한 모든 곳.” 그 뒤에 나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마도 처음에는 내 안과 밖의 구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머무는 곳,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곳, 나
내적인 갈등을 겪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한쪽 어깨에 악마가, 또 한쪽 어깨에 천사가 앉아 귀에 속살대는 것을 상상한다. 천사가 눈을 반짝이며 바른 소리를 할 때 악마는 음험한 목소리로 유혹하고, 대부분 유혹에 넘어간 ‘나’는 내 잘못이 아니야, 쟤 때문이야, 라며 화살표 꼬리를 가진 악마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부처님은 그 ‘나’가 누구인지 묻는다. 부처님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생각의 목소리가 드글거리지만 그 어느 것도 나라고 할
움베르토 에코는 해박함과 명철함, 그리고 유머감각을 지닌 기호학자이자 소설가다. “백과사전적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의 결합”이라는 평을 듣는 첫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이후 활발하게 소설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 대한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그가 “유동사회”라고 이름붙인 현재의 사회상을 펼쳐놓고 툴툴거린 칼럼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렇다. 그는 위트있고 굳건하게, 그리고 쉬지않고 툴툴거린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이 미친 세상을 향해. 명민한 그가 꿰뚫어본 이 사회의 문제점은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