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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하동 쌍계사 동방장(東方丈)

기자명 법상 스님

마음은 말로써 전할 수 없다

십계익 선사가 염송한 게송
법은 중생의 본성 되는 마음
그대도 이런 도리 깨달아야

하동 쌍계사 동방장(東方丈)/글씨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1908~1991).
하동 쌍계사 동방장(東方丈)/글씨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1908~1991).

靈鷲拈花示上機 肯同浮木接盲龜
영축염화시상기 긍동부목접맹구 
飮光不是微微笑 無限淸風付與誰
음광불시미미소 무한청풍부여수
(영축산에서 꽃을 들어 상근기를 보이셨음은/ 눈먼 거북이가 떠다니는 나무토막을 만난 것과 다름없거늘/ 음광(飮光)이 이를 보고 미소 짓지 아니하였다면/ 한량없이 맑은 바람을 누구에게 주었을까?)

‘선문염송(禪門拈頌)’ 가운데 염화(拈花)에 대한 공안에서 삽계익(霅溪益 ?~?) 선사가 염송(拈頌)한 게송이다. 삽계익 선사는 송나라 임제종의 스님으로 일익(日益) 선사를 말한다. 위 게송은 우리나라 재의례에서는 염화게(拈花偈)라고 하며 ‘산보집’ 상단영청지의(上壇迎請之儀) 등에 나오는 게송이다. 마지막 게송의 청풍(淸風)은 원문에는 청향(淸香)으로 되어 있으며 원문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영축산으로 발음해야 할까, 영취산으로 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축산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보종찰(佛寶宗刹)인 통도사를 영축도량(靈鷲道場)이라고 표현하지 ‘영취도량’ 이라고 읽지 않기 때문이다. 영축산이라고 읽는 것은 불교에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영역이며 시빗거리로 삼으면 안 된다. 불교는 이러한 글자의 예(例)가 제법 많다. 도장(道場)이라 아니하고 도량(道場)이라고 읽는다. 남천(南泉)이라 읽지 아니하고 남전(南泉)이라고 읽는다. 지혜를 보리(菩提)라고 하는데 이를 자전에 적용하면 보제(菩提)가 된다. 법당에 걸어 놓은 불화를 탱화(幁畵)라고 하는데 ‘탱’이라는 글자를 자전에 적용하면 정(幀)이다. 

영축(靈鷲)은 곧 영축산이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 라자그리하[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지금 인도의 비하라주 라즈기르 동쪽 산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다는 근거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염화품(拈花品)에 나온다. 문제는 이 경전이 위경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다른 경전에 유사한 표현이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없다.

‘문불결의경’에 보면, 영축산에서 대비구 8만 명이 모여 부처님의 법을 듣고자 하였는데 이때 방광대범천왕(方廣大梵天王)이 묘법연금광명대바라화(妙法蓮金光明大婆羅華)라는 연꽃을 들어 부처님께 올렸다. 보좌(寶座)에서 이 연꽃을 받으신 부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연꽃을 들고 계셨다. 대중들도 어리둥절하여 침묵하고 있을 때 장로 마하가섭이 파안미소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가섭에게 부촉한다고 하셨다. 이 도리를 염화시중(拈花示衆) 또는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 한다. 

시상기(示上機)는 상근기의 법문을 보이셨다는 표현이다. 아무도 이를 알아듣지 못하였지만, 제자 가섭이 이 도리를 단박에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섭은 왜 미소만 지었을까? 부처님은 무슨 근거로 가섭에게 법을 전하여 주었다고 하였을까? 이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러한 도리를 심야불어(心也不語)라고 한다. 마음은 말로써 전할 수 없기에 부처님과 가섭은 이러한 도리를 지금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음이다. 무설설(無說說)하고 불문문(不聞聞)하였다, 말한 바 없는데 말한 것이요, 들은 바가 없는데 들었음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정법안장을 너에게 주노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삿됨을 배제하기에 정(正)이 되고, 본보기가 되는 것이기에 궤범(軌範)이 되는 것이다. 고로 법(法)이라 한다. 밝게 비춤이기에 안(眼)이라 하고, 모두 감싸 들이기에 장(藏)이라고 하는 것이다.

음광(飮光)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한 분인 가섭존자(迦葉尊者)다. 그는 전생에 단금사(鍛金師)로 일을 하였기에 몸에 금빛이 나서 음광승존(飮光勝尊)으로 불렀다고 한다. 원문에 따라 무한청향(無限淸香)은 한없는 맑은 향기며 곧 법향(法香)이다. 법(法)은 중생의 본성이 되는 마음이다. 부여수(付與誰)는 그대도 곧 이러한 도리를 깨달으라는 뜻이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616호 / 2022년 1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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