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맞이 소·확·행

입춘이 지난 2월은 꽃 없는 봄이다. 사람들이 겨울은 갔고 봄이 곧 올 것임을 예감해버린 탓이다. 그렇다고 봄을 애타게 혹은 유별나게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다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켜볼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봄은 슬그머니 우리의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때 ‘봄’은 아마도 ‘꽃’일 터이다. 마음은 벌써 그 꽃밭에 가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막상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 가슴 설렜던 경험은 일찌감치 우리의 추억이 되었음을 안다.

추위가 안부를 물으러 온 입춘에게 완전히 뒷덜미를 잡혀버린 모양새다. 한강까지 얼어붙게 만들던 동장군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옛 연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어서 미끄럽던 길바닥이 어느새 폭신폭신한 산책로가 되었다. 겨울은 이미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친구의 신세나 마찬가지다. 꽃샘추위라는 핑계로 한두 번 찾아올 수는 있겠지만, 그저 옛 연인의 관성적인 몸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옛사랑의 미련은 새 사랑의 환희를 이길 수 없다. 그렇게 옛사랑 겨울이 가고 새 사랑 봄이 온다. 겨울은 벌써 옛 연인이 되었고 봄은 이미 새 연인으로 자리 잡았다. 미련은 사랑을 추하게 만든다. 겨울은 더 이상 봄을 질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새 사랑을 축하해주는 것이 옛사랑의 여유다. 꽃피고 새우는 봄은 누구에게나 첫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감정 소비영역을 이기적으로 좋아한다. 이른바 소·확·행(小確幸)을 즐길 때 나는 오로지 나밖에 모른다. 가족으로부터도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이란 핀잔을 달고 산다. 옷이나 신발을 통해 에고이스트적인 욕망을 과소비하고도 소·확·행이라고 우겨대기 일쑤였다. 이런 이기적인 행동을 그럴듯하게 얼버무리고 포장할 수 있는 개념으로 ‘소·확·행’ 만한 안성맞춤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그까짓 것 하나 못 사느냐고 어깃장을 놓으면서 나만의 소·확·행을 쾌락하는 즐거움은 예상보다 황홀하다. 무소유는 왠지 부담스럽지만 소·확·행은 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치열한 수행보다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는 불멍과 물멍에 환호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것도 어쩌면 소·확·행의 보편화 현상일지도 모른다. 너무 무거우면 들기 힘들다. 적당히 들 수 있는 무게여야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이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를 조금은 되돌아보게 하는, 느낌적 계기로 삼았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겨우 내내 쓰고 다니던 우중충한 모자를 버리고 산뜻한 비니모자를 새로 하나 장만했다. 기분전환도 할 겸 나를 위한 작은 봄맞이 소·확·행 행사였다. 내가 고른 색깔은 봄에 돋을 새싹을 연상시키는 밝은 빛 초록색이었다. 연노랑과 진초록을 섞은 듯한 세련된 빛깔로 단번에 내 눈을 사로잡았다. 봄을 낚았다는 손맛을 느낄 정도였다. ‘효과’는 그야말로 ‘기대’를 초월했다. 이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다. 머리에서부터 봄이 내려앉은 느낌은 하루종일 나를 즐겁게 한다. ‘할배’ 연세에 산뜻한 모양의 머리덮개 하나로 적어도 ‘아재’ 나이는 확실히 회복한 것 같으니 말이다. 

이렇게 나만의 이기적인 소·확·행 놀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밑자락 사이에서 앙증맞은 비니모자 하나가 나의 봄맞이 소·확·행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었다. 가끔 한 번씩 상상 속의 계절밥상을 주문해본다. ‘봄엔 바람이 꽃전을 부쳤고 여름엔 비가 오이냉국이 되었다, 가을엔 서리가 호박죽을 쑤었고 겨울엔 얼음이 청국장을 끓였다’는 자연의 식탁을 그려봤다. 저마다 고소하고 시원했으며 구수하고 따뜻했다.

문득 봄엔 어디론가 잠시 포행(布行)이라도 다녀와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을 받는다. 언젠가 봄엔 꼭 마곡사를 들러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조만간 결혼한 뒤 30년 이상을 교회바이러스 보균자로 사는 집보살에게 모처럼 절구경이라도 한번 가자고 졸라봐야겠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21호 / 2022년 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