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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기자명 김태형

살아있기에 마주할 수 있는 행운

비 멈춘 산사 개구리 울음 소리
긴 추위 견뎌낸 한 송이의 매화
수난 속에서 성보 온전한 것은
위법망구 희생한 스님들 덕분

봄비에 젖은 송광사 계곡과 삼청선각.
봄비에 젖은 송광사 계곡과 삼청선각.

봄비가 내렸다. 봄눈을 기다렸지만 비가 내렸다. 오랜 겨울 가뭄에 간신히 목만 축인 정도다. 봄꽃을 피워내는 초목들에게는 그야말로 감로수 같은 비다.

비 오는 산사는, 특히 봄비가 내리는 산사는 적막하다. 가만히 안개와 구름이 밀려오는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온갖 번뇌 망상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산정상에는 구름이 나무들을 어루만지고, 계곡의 안개는 겨울의 묵은 때를 벗겨내 봄을 맞는다.

비가 멈춘 아침 산사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살아 있어서 고맙다는. 아직은 얼음이 떠 있는 낙하담 바위틈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성당 앞 산수유도, 대웅전 앞 매화도 지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살아서 꽃을 피우려 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고마움을 느낀다. 봄의 산사를 거닐면서 겨울에 만나지 못했던 생명들을 다시 만나면 그렇게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살아 있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선연(善緣)이든 악연(惡緣)이든. 살아서 만나야 더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고, 비록 원수일지언정 살아서 만나야 해원(解冤)을 하고 좋은 인연으로 이어 갈 수 있지 않은가.

어느덧 송광사에 온 지 만 5년이 된다. 지난 5년의 시간 대부분은 수장고 유물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획전을 열거나 상설전을 보완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송광사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과 함께 잊혀진 역사의 편린들을 찾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1951년 공비 토벌과정에서 큰불이 나 송광사 중심부 영역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미 1948년 여순사건으로 인해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공비토벌을 이유로 절을 비워야 했던 당시에 송광사 스님들은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중요 유물들을 땅에 묻거나 법당이나 요사 천정에 숨기고 또 일부는 피난지로 대피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화마로 인해 보조국사 가사 등의 유물이 불에 탔고 대웅전과 설법전 등의 법당과 요사채들도 한 줌 재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많은 유물이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당시 스님들의 목숨을 건 위법망구(爲法忘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수백년 법당에 봉안돼 있다가 어느 날 사라진 유물 한 점이 다시 돌아온다. 이로써 이산가족이 되었던 유물이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와 상봉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사라졌던 이 유물도 어떤 인연을 거치고 거쳐 한 줌 재로 변해 사라지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더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 이 봄에 나는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김태형 송광사성보박물관 학예실장 jprj44@hanmail.net

[1623호 / 2022년 3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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