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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네거리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야당 후보의 대선공약을 듣고 짜증 비슷한 감정이 치솟았었다. 크고 작은 행사로 광화문 부근이 걸핏하면 통제되는 일이 발생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광화문 네거리는 출퇴근하는 버스의 정류장이 있는 곳이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개인의 ‘이익’은 공동체의 ‘대의’를 외면하기 마련인가 보다. 기껏해야 나는 ‘여럿’의 불편을 나 ‘혼자’ 불평하는 못난 중생에 불과했다. 대선이 끝나고 잠시 광화문 시대라는 말이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없었던 일이 되고 만듯하다.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는 당선인의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수선할 뻔했던 광화문 일대를 마음 놓고 걸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어제처럼 행복하다. 

그때 광화문에는 아직 교보문고가 없었다. 약속은 당연히 ‘종로서적 입구’에서 하는 줄만 알았다. 큰길 건너 광화문 방향으로 들쭉날쭉했던 피맛골엔 그렇게 만난 청춘남녀들을 살갑게 맞아주던 식당들이 많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교보문고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서가도 훨씬 넓었을 뿐만 아니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둘러 종로서적을 버리고 교보문고를 품었다. 새것이 헌것보다 좋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종로서적의 늙은 낭만은 교보문고의 젊은 미모를 이길 수 없었다. 세태를 탓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 모든 약속은 ‘교보문고에서’로 바뀌었다. 한동안 종로서적과 교보문고는 불편한 동거를 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교보문고가 종로서적을 일방적으로 밀어내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대신 종로서적은 그곳을 찾던 고객들에게 추억 속의 별이 되었다. 그만큼 종로서적은 우리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만들던 장소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에게 종로서적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같은 곳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다.

그즈음 피맛골도 개발의 속도전을 견디지 못하고 익숙했던 골목들을 하루아침에 상실했다. 이전의 그곳과 지금의 이곳엔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고급스럽지만 왠지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 모퉁이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의좋은 형제 같던 식당들도 모조리 없어졌다. 더러 같은 이름의 식당이 신축 오피스텔에 입주하기도 했지만 이미 옛날 맛이 아니다. 음식의 맛은 공간과 사람과 분위기가 빚어내는 오케스트라다. 그런 것 하나 없는 막내낙지 집의 낙지 맛은 도저히 그때의 그 맛일 수 없다. 법보신문사가 둥지를 틀고 있는 르메이에르 빌딩도 선후배들과 자주 어울려 다니던 허름한 백반집이 있었던 곳이 아닐까 싶다. 피맛골의 감상에 젖어 있다가 어느새 광화문 네거리로 접어들었다. 4·19기념 등반대회가 끝나고 그날의 행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던 곳은 언제나 광화문 네거리 언저리였다. 세종문화회관 뒤편의 종로 빈대떡집은 젊은 대학생들이 즐겨 찾던 소문난 이모집이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던 노릇노릇한 빈대떡이 쉴새 없이 몸을 뒤척이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지나간 것은 무조건 그리운 것이다.

늦은 시간 광화문 네거리는 직장인들의 아쉬운 이별사가 밤공기를 가르는 정겨운 공간으로 변한다. 버스에 올라서도 차창 밖으로 한동안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다. 아침에 타고 온 버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도 별수 없이 얼른 올라타야 할 일만 남는다.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와대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금방이다. 구중궁궐이라는 오명을 가진 청와대를 머지않아 구경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차기 대통령이 취임식 당일부터 곧바로 시민들에게 개방하겠다고 못 박은 데 따른 것이다. 갑론을박이 없지 않으나 조만간 청와대 나들이가 쉬워질 것 같기는 하다. 그저 시민들의 평화로운 녹지공원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다. 이왕이면 그 자리에 고즈넉한 전통 사찰이 들어선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뜬금없는 상상도 해본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26호 / 2022년 3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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