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9.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28)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11)

의천 스님에 의해 재조명 된 뒤 잊혔다 일본 학자들에 의해 되살아나

원효의 80여 저서 중 대승기신론 관계 저술이 중요한 비중 
9세기 의상의 화엄종이 주류가 되면서 원효 저술은 잊혀져
현재 전해지는 ‘별기’와 ‘소’ 모두 일본서 발견된 것이 저본

1899년 중국 남경 금릉각경처에서 간행한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회본’의 인쇄본과 해인사 소장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회본’ 판목, 판목은 금릉각경처에서 간행한 활자본을 목판으로 복각했다.
1899년 중국 남경 금릉각경처에서 간행한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회본’의 인쇄본과 해인사 소장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회본’ 판목, 판목은 금릉각경처에서 간행한 활자본을 목판으로 복각했다.

원효의 80여종 저서 가운데 ‘대승기신론’ 관계 저술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 연구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 관계 저술로 이름이 전해지는 것만도 ‘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1)권, ‘대승기신론종요’ 1권, ‘대승기신론요간’ 1권, ‘대승기신론대기’ 1권 등 5종이며 근대에 ‘대승기신론’ ‘소’ ‘별기’를 하나로 통합하여 엮은 ‘대승기신론소기회본’ 6권이 있고, ‘대승기신론’ 관련 특정 문제를 다룬 저술로서 ‘일도장’ 1권 ‘이제장’ 1권 등도 있다. 

원효가 ‘대승기신론’에 특히 주목한데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중국과 신라에서 ‘열반경’ ‘섭대승론’ 연구와 함께 ‘대승기신론’ 강설이 유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중국불교계는 ‘대승기신론’ 주석서를 저술한 열반종의 담연(曇延)・지론종의 혜원(慧遠)・섭론종의 담천(曇遷)을 비롯해 도선(道宣)의 ‘속고승전’에서 ‘대승기신론’의 강설자로서 이름을 전해주는 보명(普明)・영윤(靈潤)・정림(靜琳)・지초(志超)・도영(道英) 등이 있었다. 신라 불교계에서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을 비롯하여 중국 유학승들이 귀국하여 ‘섭대승론’을 강설하고 있었으며, 특히 원광은 ‘여래장경사기’ 3권과 ‘대방등여래장경소’ 1권 등의 저술을 남길 정도로 여래장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원효는 법화행자였던 낭지로부터 ‘법화경’, 승조(僧肇)의 후신으로 일컬어졌던 혜공으로부터 반야중관불교, 고구려 보덕으로부터 ‘열반경’을 공부하고, 신라에 전해지는 섭론종의 구유식학과 여래장불교를 공부한 바탕 위에서 다시 현장의 신유식학을 접하게 되자, 국제적 불교계에 대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그리고 당 유학을 시도하다 실패하였지만, 당과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불교계의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인식하고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원효는 현장 번역의 ‘유가사지론’을 중심으로 신유식학을 접한 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문제, 즉 구유식과 신유식의 갈등, 그것에서 파생된 불성의 유무, 공유의 대립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대승기신론’을 발견하고, 연구에 몰두해 일련의 저술들을 내놓게 되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 주석서 중 오늘날 전해지는 실물은 ‘대승기신론소’와 ‘별기’ 등 2종뿐인데, 일반적으로 ‘대승기신론’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주석한 것이 ‘별기’이고, 뒤에 ‘대승기신론’과 관련된 개별문제들을 검토하는 저술 작업과 함께 본격적으로 주석한 것이 ‘소’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별기’는 서문인 대의(大意) 부분에서, “스스로를 위해 기록하는 것일 뿐이고, 감히 세상에 유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술회하였듯이 연구를 위하여 중요한 문제점들을 기록한 일종의 연구노트 성격을 가진 것이었고, 뒤에 ‘일도장’과 ‘이제장’ 같은 개별의 문제점들을 검토한 저술을 지은 뒤에 체계적인 주석서로서 ‘소’를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별기’는 인연분(因緣分)・입의분(立義分)・해석분(解釋分)・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입의분과 해석분 2부분만을 주석한 것인데 비하여 ‘소’는 전체를 종합적으로 주석한 것이다. 두 책은 내용에서 중복되는 부분이 많지만 차이가 나는 부분들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원효의 ‘대승기신론’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곧 사상적 변화과정을 읽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양자의 본문 내용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내용면에서 ‘별기’가 ‘소’보다 자세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들어 ‘소’의 내용을 심화시키는 보완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성격을 달리하여 찬술되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별기’는 ‘소’보다 먼저 찬술되었지만, ‘소’가 찬술된 이후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형태로 재편집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종합하면 동시의 찬술설을 제외하면 ‘별기’가 처음 찬술되고, 시차를 두고 ‘소’가 뒤에 찬술된 것인데, 문제는 ‘별기’ 내용에서 수정되거나 추가된 부분이 있어서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별기’ ‘소’와는 별도로 전해지는 ‘대승기신론소기회본’(이하 회본)은 ‘대승기신론’ ‘별기’ ‘소’를 종합하여 문단별로 하나로 엮은 편집본이다. 그러나 ‘별기’의 독자성을 간과하고 ‘소’와 다른 부분만을 무분별하게 편집하여 구성하였기 때문에 ‘회본’을 통해서는 ‘별기’의 전문을 알 수 없게 되었고, ‘별기’와 ‘소’ 양자 사이의 서술 내용의 차이나 사상의 변화도 읽어낼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의 주석 작업들은 모두 이 ‘회본’에 의거해서 이루어져 오고 있는데, ‘별기’의 내용을 온전하게 옮긴 것이 아니며, ‘별기’와 ‘소’ 양자의 내용상 차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하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일각에서 ‘회본’의 주석과는 별개 작업으로 ‘별기’와 ‘소’의 정본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지만, 단순한 글자의 교감에 그치지 않고 양자 사이의 찬술 시기 차이와 내용에서의 성격 차이가 동시에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전해져 온 필사본이나 간행본 자체가 ‘별기’나 ‘소’의 원래 모습인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별기’와 ‘소’의 서술내용을 비교 검토하기에 앞서 개략적으로나마 ‘별기’와 ‘소’의 유통과 전승과정을 추적해 보려고 한다.

원효의 화쟁불교, 곧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근거를 마련한 ‘대승기신론’ 연구는 670년 화엄종 의상의 귀국, 그리고 690년 ‘대승기신론의기’를 포함하는 법장(法藏)의 화엄학 관계 저술들의 전래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700년대 이후에도 ‘대승기신론’ 자체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지만, 중점은 원효의 ‘별기’와 ‘소’, 그리고 법장의 ‘의기’에 대한 해석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두 사람 이외의 원측과 자은기 등 다른 학승들의 저서들도 참조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태현과 견등을 비롯한 많은 학승들에 의한 ‘대승기신론’ 연구는 ‘대승기신론’ 자체보다도 원효나 법장 등의 주석을 연구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렇게 ‘대승기신론’ 연구 경향이 훈고적인 주석 위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원효가 격렬한 논쟁 속에서 ‘대승기신론’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쌓아올린 화쟁불교, 곧 종합적인 불교사상은 학습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어 그 해석을 둘러싸고 공허한 논쟁을 불러오게 되었다. 더욱이 9세기 이후 신라불교계에 의상 직계의 화엄종이 주류가 되면서 ‘일승법계도기’에 대한 주석 작업이 성행하게 된 반면 ‘별기’와 ‘소’를 비롯한 원효의 저술들은 잊혀가게 되었다. 의상의 직계 법손인 균여의 저술에는 ‘소’가 1회 인용되었을 뿐이고, ‘별기’가 인용된 사례는 찾을 수 없다.

고려불교계는 원효의 저술이 잊혀 가는 가운데 한때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의천에 의한 교장의 간행이었다. 의천이 1090년 편집한 ‘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 신라학승들의 저술이 대폭 수록되는 가운데 원효 저술만도 44종이 포함되었으며, ‘대승기신론’ 주석서 5종과 2종의 관련 저술이 모두 수록되었다. 의천은 실로 원효불교의 재발견자로서 의상과 함께 원효를 화엄종의 조사로 받들어 ‘화쟁’이라는 시호와 함께 국사를 추증하였다. 특히 의상의 직계가 아니었던 화엄사 연기(緣起)의 진영에 참배하며 지은 시에서 ‘화엄경’을 ‘웅경(雄經)’, ‘대승기신론’을 ‘위론(偉論)’으로 칭송하고, 그의 ‘대승기신론’ 주석서 2종을 교장목록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의천 사후 원효 불교는 다시 잊혀 갔으며, 13세기 재조대장경을 간행할 때에는 균여의 직계 법손들이 주도하면서 의상 계통과 균여의 저술들을 간행하는 가운데 원효의 저술은 ‘금강삼매경론’ 1종만이 포함되었을 뿐이었다. 더욱 13세기 이후 선종계인 조계종이 불교계 주류로 등장하면서 교학연구가 부진해져 원효의 저술가・사상가로서의 면모는 잊혀지고, 대중교화사로 모습만이 전승되기에 이르렀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전반적으로 쇠퇴해가는 가운데 세조가 의천의 교장도감에 비교되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의천이 간행했던 교장들을 복간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교학이 일시 부흥되는 듯 했다. 그러나 선정된 불서들 가운데 신라학승들의 저술은 제외되었고, 원효의 저술 또한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대승기신론’의 주석서로는 법장의 ‘의기’와 자선(子璿)의 ‘필삭기’만을 선택하여 한국불교의 기본 텍스트가 되게 함으로써 원효의 ‘대승기신론’ 연구 맥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선종 일색의 불교계가 되면서 불교학은 더욱 침체하게 되었는데, 1671년 임자도에 표착한 중국 선박에 탑재되었던 불서를 간행할 때에도 ‘대승기신론’ 주석서로는 ‘대승기신론・필삭기회편’만이 포함되었다. 이 결과 한국불교계에서는 당의 법장과 송의 자선 등 2인의 ‘대승기신론’의 주석서가 정통의 권위를 갖고 유통하게 되었던 반면에 원효의 ‘별기’와 ‘소’는 잊혀지게 되었다. 현재 해인사에는 “기신효소(起信曉疏)”라는 제목의 판목 한 장(앞뒷면 8-9장)만이 남아 고려시대 이전의 원효 ‘소’의 유통 상황을 쓸쓸하게 증언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학자들에 의해 고려대장경을 비롯한 불서판목과 판본들의 조사가 추진되었고, 불교 전문잡지들의 간행, 일본에 다녀온 유학생들에 의해 신라와 고려시대 고승들의 전기와 저술의 조사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에 수반하여 원효의 저술들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이렇게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과 저술들에 대한 연구 분위기가 성숙되어 가는 가운데 원효불교 발견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학자가 최남선이었다. 그는 1930년 발표한 논문 ‘조선불교-그 동방문화사상에서의 지위’에서 종합불교론・통불교론을 제기하고 중심인물로서 원효를 주목하였다. 해방 뒤에 최남선의 통불교론은 더욱 확대되어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론으로 규정되었고, 나아가 한국불교의 우수성 주장의 담론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원효불교의 종합불교・통불교의 성격 규정은 타당한 견해이지만, 한국불교 전체의 성격규정으로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괴리되는 주장이다.

한편 한국불교계에서의 원효의 화쟁불교와 저술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인식의 변화 배경에는 일본 불교계에서의 대정신수대장경과 일본속장경의 간행이 있었다. 현존본인 ‘별기’와 ‘소’는 모두 대정신수대장경에 편입되어 간행된 것이고, 그 저본은 일본 다이쇼대학(大正大學) 소장의 만지(萬治) 2년(1659) 간행본(별기)과 겐로쿠(元祿) 9년(1696) 간행본(소)이다. 또한 현존본인 ‘대승기신론소・별기회본’은 1899년 금릉각경처에서 양문회(楊文會)가 간행한 활자본을 해인사 소장의 목판본으로 복각한 것인데, 금릉각경처 간행본은 일본에도 전달되어 일본속장경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금릉각경처 간행본은 양문회가 교류하던 일본의 난죠분유(南條文雄)로부터 입수하여 편집한 것이다. 동국대학교에서 편집 간행한 한국불교전서 1책에 수록된 ‘별기’와 ‘소’는 대정신수대장경, ‘회본’은 해인사 소장 목판본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서 모두 일본에서 전해져 오던 것들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26호 / 2022년 3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