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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30)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13)

원효의 불교사상은 화엄사상과 더불어 동아시아 최고의 사유체계

원효는 공‧유 대립 해결 문헌으로 기신론 주목한 유일 인물
구역불교 바탕으로 신유식학 받아들인 구역 쪽 절충파 대표
기신론소 저술 전에 일도장‧이장의 등 통해 특정 주제 논술  

중국 시안 근교 흥교사에 세워진 원측의 승탑.
중국 시안 근교 흥교사에 세워진 원측의 승탑.

진덕여왕 2년(648) 윤12월 신역경전 ‘유가사지론’의 전래로 원효의 불교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현장의 신역이 일으킨 구역불교와 신역불교의 갈등이라는 당 불교계의 파문소식은 구역불교의 이해에 전념하던 원효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김춘추가 실권을 장악하고 친당정책을 실시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당 불교계의 파문소식도 빠르게 신라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원효가 급거 당 유학에 나선 것은 34세 때인 진덕여왕 4년(650)이었는데, 구역불교의 경전들을 폭넓게 섭렵하고 있던 청년 원효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육로를 통한 당 유학 시도는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후 10여년 동안 원효는 구역불교를 바탕으로 신역경전의 이해를 추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별기’에서 인용된 경론들이 ‘불지경’(645) ‘현양성교론’(646) ‘대승아비달마잡집론’(646) ‘해심밀경’(647) ‘유가사지론’(648) 등 모두 648년 이전 번역된 것임을 감안하면 ‘별기’의 작성이 늦어도 660년 이전, 650년대 중반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효는 구역불교를 바탕으로 신역경전의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신역으로 인한 불교계의 여러 갈등, 특히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공(空)・유(有) 대립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 대립을 극복해줄 수 있는 경론으로서 ‘대승기신론’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가 ‘대승기신론’의 발견에 크게 고무되었던 사실은 최초의 주석서인 ‘별기’에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을 지적한 뒤 결론으로 “이 경론(대승기신론)이야말로 모든 경론의 조종(祖宗)이요, 모든 쟁론의 평주(評主)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술회한 최상의 찬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도 마명(馬鳴)이 저술하고, 진제(眞諦)가 한역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승기신론’은 원효 이전에 열반종 담연(曇延), 지론종 혜원(慧遠), 섭론종 지개(智愷)와 담천(曇遷) 등의 주석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강설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열반경’이나 ‘섭대승론’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적인 경론으로서 ‘대승기신론’을 주석하고 강설하였을 뿐이었다. ‘대승기신론’을 여타 경론의 이설들을 종합하고, 특히 중관과 유식의 이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헌으로 이해한 인물은 원효가 최초였던 것 같다. 근대 불교학계에서 ‘대승기신론’의 중국 찬술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으나, 원효는 물론 당시 불교계에서 위경으로 의심하는 인물은 없었다. 뒷날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정립시켜준 ‘대승기신론’과 함께 실천원리를 제공해준 ‘금강삼매경’ 또한 위경으로 평가되고 있는 점은 별도의 검토가 요구된다.

한편 중국불교사, 동아시아불교사의 전후시기를 구분케 한 현장의 역경사업에 신라 출신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역의 경론과 교의는 이들 신라 승려들에 의해 속속 신라 본국에 전해졌을 것이다. 현장의 뛰어난 4인의 제자 가운데서 신방(神昉)은 신라 출신으로 역경에 증의(證義)로 참여했으며, ‘십륜경소’ ‘성유식론요집’ ‘종성차병장’ 등을 저술하였다. 역경 초기 증의의 필두로 참여하여 현장 신역의 무불성설 등을 비판하였던 영윤(靈潤)이 현장의 제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을 때에 반론을 제기하여 영윤을 변호한 의영(義榮)도 신라 승려였다. 그리고 현장에게 신역의 교의를 배우면서 구역경전과 절충하여 공유 대립의 화회를 시도하고 불성설도 긍정하는 교학을 펼쳤던 원측(圓測)도 고국인 신라에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원측의 주저인 ‘성유식론소’나 ‘해심밀경소’ 등은 현장 직계인 자은학파에게 비판을 받게 되어 서명학파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순경(順璟)은 현장에게 신유식을 수학해 유식의 논증 방법을 배우고 신라로 돌아왔다. 666년 즈음 순경은 현장의 인명사상을 전해 듣고 그와는 다른 자신의 견해를 사신 편에 당나라에 보냈는데, 현장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제자인 자은 기(基)가 이를 보고 높이 평가하였다고 할 만큼 인명에 뛰어났다.

이어 당에 유학했던 승장(勝莊)이 원측의 유식학을 계승하고, 도증(道證)과 도륜(道倫) 등이 활약하였으며, 귀국하는 사람이 증가함에 따라 신라 본국의 유식학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경흥(憬興)・의적(義寂), 그리고 다음 세대의 태현(太賢) 등 국내에서도 뛰어난 유식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리하여 구역불교와 신역불교를 절충하는 다양한 학설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원측이 현장에게 교의를 배우면서 구역불교에도 포용적인 사상 경향을 가짐으로써 신역 쪽의 절충파에 속하였다면, 구역불교를 바탕으로 하여 신유식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추구하였던 원효는 구역 쪽 절충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원효의 경우 핵심적인 주제어가 ‘한마음(一心)’과 ‘화쟁(和諍)’이라는 점은 주지된 바이지만, 그것은 원효에 의해서 갑자기 제기된 것이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현장의 신역 경전, 특히 신유식학의 대두로 중관학과의 대립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불성에 대한 논란과 함께 마음의 문제가 중심 주제로 부각되었으며, 공・유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구역 쪽이나 신역 쪽 양면에서 각각 이설들을 화회(和會)시키려는 시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성향을 가진 인물들을 절중파라고 명명한다면 원효는 절중파, 특히 구역 쪽 절중파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은 절충적인 단계를 뛰어넘어 독창적인 사상체계로까지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절충파와는 구별되는 사상사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원효의 종합적 불교사상은 지엄과 법장에 의해 집대성된 화엄사상과 함께 동아시아불교가 도달한 최고이자 최후의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의 2대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원효의 한마음과 화쟁사상의 성립배경에는 당과 신라 불교계의 변화 상황, 당과 신라의 불교계를 넘나들며 유식학 분야에서 활약하던 신라 출신의 뛰어난 승려들이 있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원효의 불교사상은 당과 신라를 넘나드는 동아시아불교계를 무대로 다양하게 제기된 학설들을 화회하고 종합하는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원효는 1차 당 유학에 실패한 이후 10여년 동안 신역 경전들을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신역으로 인한 당 불교계의 파문과 그 해결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불교계 이설들의 절충과 통합의 가능성, 특히 중관과 유식의 공・유 대립을 회통시킬 수 있는 사상체계를 제공하는 경론으로서 ‘대승기신론’을 발견하고 주석에 착수하였다. 이때 저술된 ‘별기’의 서문인 대의문은 원효의 의욕과 열정을 유감없이 나타내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신라와 당 사이의 활발한 불교교류에도 불구하고 신역경론의 입수나 소식의 전달 같은 간접적인 교류만으로는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미흡하게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전년에 백제를 멸망시켜 당으로 가는 바닷길이 훤히 열린 것도 당 유학 결행의 또 다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태종무열왕 8년(문무왕 원년, 661) 원효는 마침내 2차로 당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 유학의 동기에 대해 ‘송고승전’ 원효전에서 “현장삼장과 자은의 문하를 흠모해서였다”고 서술한 것을 보아 현장과 그 제자들을 만나보고, 불교계 상황을 직접 확인해 보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의 도반 관계인 의상과 함께 출발한 2차 시도도 중도에서 접고 말았다. 그러나 타의로 좌절되었던 1차 시도와 달리 이번은 자의에 의한 포기였다. 바로 무덤 속에서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달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었는데, 그의 깨달은 내용을 표현한 계송이 ‘대승기신론’의 문구를 차용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원효 불교에 있어서 ‘대승기신론’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원효 불교의 핵심 주제어는 ‘한마음(一心)’이었는데, 마음의 도리를 깨닫게 되면서 당 유학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661년 깨달음을 체험하고 귀환한 이후 원효는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원효의 저술시기 구분에서 3기 ‘사상체계의 수립과 대승기신론소 저술’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효는 이후 10년 이상 저술에 몰두하여 대부분의 저술들은 이 기간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기간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서 특히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수립케 한 ‘대승기신론소’ 실천원리를 제시한 ‘금강삼매경론’ 두 저술이 대표성과로 평가된다.

제3기에 이루어진 원효 저술의 성격과 내용은 4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 중심적인 저술은 앞선 시기부터 시작된 ‘대승기신론’ 주석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대승기신론’의 주석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그 논 안의 개개 문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한 ‘일도장(一道章)’과 ‘이장의(二障義)’를 저술하는 것이다. 셋째는 ‘대승기신론’과 사상적으로 관련된 경론들을 주석하고, 이후 다시 ‘대승기신론’의 주석에 집중함으로써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는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기반으로 실천원리를 제시하는 ‘금강삼매경’의 주석 작업이었다. 이로써 원효 불교의 이론체계와 실천원리가 일단 갖추어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원효의 저술 가운데 ‘일도장’과 ‘이장의’는 특정 주제에 대한 논술 형식의 저술인데, ‘별기’를 인용하고, ‘소’에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보아 ‘별기’ 이후 ‘소’에 앞선 시기의 저술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일도장’은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는 ‘화엄경’ 장소로 분류되었으나, 일본의 정창원문서에는 ‘기신론일도장’으로 표기된 것을 보아 ‘대승기신론’ 관련 저술로도 전승되었던 것 같다. ‘일도장’은 현존하지 않지만 일문(逸文)을 통하여 ‘대승기신론’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 근거하여 종성이나 계위의 문제를 논한 저술로 추정된다.

다음 ‘이장의’는 단혹(斷惑)의 문제에 대하여 구역과 신역의 설을 들어 일체 번뇌를 번뇌애와 지애, 곧 번뇌장과 소지장 등 이장의 주제로 제시하고 각각 유식 문헌의 현료문과 여래장 문헌의 은밀문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은밀문의 번뇌애 속에 현료문의 번뇌장과 소지장이 포섭되는 것으로 해석한 역작이다.

‘이장의’는 정창원문서에서 ‘기신론이장장’으로 표기되었던 것을 보아 ‘대승기신론’ 관련 저술로서 ‘유가사지론’ 등의 유식사상을 ‘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에 포섭시키려는 원효의 불교사상체계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장의’에는 ‘별기’와 ‘일도장’이 언급되고 있는 반면, ‘소’ ‘금강삼매경론’ ‘열반경종요’ 등에서 ‘이장의’를 언급하고 있으며, ‘유가사지론’ ‘현양성교론’ ‘아비달마잡집론’ 등의 신역초기의 경전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반면, 신역 후기의 경전인 ‘성유식론’(659)이 인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660년대 이른 시기의 저술로 추정된다. 원효의 저술에서 법상종 교학의 정치한 논리를 제공한 ‘성유식론’이 처음으로 인용되는 것은 671년 저술이라고 원효 스스로 밝힌 ‘판비량론’에 와서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30호 / 2022년 4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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