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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후반기를 아름답게 장엄한 포교사의 길

기자명 법보

법보신문 사장상 - 송병화

이타행 발원하며 포교사의 길…전등사에서 불교문화해설
코로나19로 남편과 함께 실직…참회 기도와 108배로 극복
걷기순례 동참하며 맨발로 종일 걸었던 부처님 전법 되새겨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어색한 음정과 박자에 고개를 끄덕이며 포교사의 노래를 읊조리던 그날, 나는 포교사 품수를 받고 제대로 부처님 제자가 되어 보기로 마음 먹었다. 풍성한 갈색 단복에 나의 모든 고된 삶을 감추듯 밀어 넣고 새로운 광명으로 들어갔다. 지난 8년간 선묵혜자 스님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 산사 순례’를 하며 만났던 불교문화재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불교문화해설팀 포교사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불교 문화와 문화재를 깊이 공부를 해보리라는 다짐과 함께 강화도 전등사에서 불교문화해설 활동을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도반 포교사들과 팀을 이루어 전등사를 방문하는 일은 행복이었다. “차 한 잔의 여유, 마음을 열자!”라는 배너를 절 마당 한쪽에 세워놓고 방문객들에게 차를 나누어주며 전등사와 경내 불교 문화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대웅전 앞에서 단풍잎 같은 두 손을 합장하는 아이부터 굴곡진 삶의 계급장을 달고 어려운 발걸음을 옮기는 어르신, 타국에서 건너와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리는 젊은이, 종교를 초월해 방문한 교인, 신부님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단체로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사진도 찍어주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쫓아가 사찰 안내지를 주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고단했다. 하지만 포교사 명찰을 달고 누군가에게 나의 앎을 나누어주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깃털처럼 창공을 날았다. 

나는 노후대책으로 포교사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앞으로 내 후반부 삶은 타인에게 이로운 행을 하며 수행 정진하는 포교사로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전등사를 가지 않는 날은 재적사찰 불교대학과 일요법회 소임을 보며 수행을 이어갔다. 포교사로서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지낸 지 2년 정도 넘긴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우리 일상까지 멈춰 세웠다. 중국을 오가며 사업하던 남편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고 학교 강사로 활동하던 나는 백수가 되었다. 제행무상의 도리를 알기에 조금만 견디면 지나갈 것이라고 믿었던 코로나는 우리를 비웃듯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자리를 잃은 남편과 나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다툼이 잦아졌고 하루 살아가는 일조차 버거웠다. 코로나를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괴로움도 눈덩이처럼 부풀었다. 

그 무렵 내 안부를 물으며 쌀 포대를 가지고 집으로 찾아와 격려해주고 간 따듯한 손길이 있었다. 그동안 부처님께 올렸던 공양이 인연 되어 내게 다시 돌아온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집 안에 갇혀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온전히 기도에 맡겼다. 유튜브로 중계되는 재적사찰의 법회에 들어가 참회기도를 했고 날마다 108배를 올렸다. 경전도 눈앞에서 놓지 않았고 포교사단에서 배부한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 정진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노력만큼 마음의 평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가 차단된다는 것은 고립을 의미했다. 오랜 시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냈던 즐거운 기억들은 이제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넘어 우울감까지 데리고 왔다. 태양은 날마다 뜨고 지고를 반복하며 6개월쯤 흘렀다. 

무료함에 익숙해지고 컴퓨터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일상이던 어느 날, 인터넷 검색 도중 지역 불교방송에서 주최하는 문예마당 원고 모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주저 없이 코로나로 억압됐던 답답하고 그리운 내 감정을 글에 실어보기로 했다. 마음속 감정에 글자를 하나씩 입히면서 번뇌 티끌들이 묻어 나왔다. 밖으로만 나다니며 챙기지 못했던 내면의 모습도 만날 수 있었다. 내 안의 나는 겉으로 내보이지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인간이 훼손한 수많은 자연과 존재의 재앙이 코로나며 그로 인해 내가 지금 갇혔고 그래서 공생해야 한다는 도리도 일러주었다. 밖에서 굳게 잠긴 문은 지혜롭게 안에서 열어야 함을 말해 주었다.

‘우리’를 주제로 그려간 내 글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는 곧 나를 품은 겹꽃이다. 홀로 핀 홑꽃보다 군락 이룬 겹꽃이 아름답고 단단하듯 ‘우리’가 되면 강력한 힘이 생겨 코로나도 이겨낼 수 있다”라는 것이 요지였다. 상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출품했기에 ‘동상’이 내게 왔을 때는 밖에서 잠겼던 모든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마음이 들려주는 소리를 열심히 듣고 글로 옮긴 것뿐인데 상까지 받으니 큰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나는 코로나를 극복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 개최된 백일장과 수기에 도전하여 크고 작은 성과를 이루었다.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마스크로 입을 가려 제대로 하지 못했던 수많은 내 안의 말들은 컴퓨터 자판을 통해 문자화되었고 세상 사람들과 만나 소통했다. 글쓰기가 나 자신을 치유하는 또 다른 수행과정이 될 수 있음도 깨달았다. 

내친김에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두었던 삶의 기록을 써보기로 했다.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지표를 세우고자 자서전을 출판하기로 원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외출이 뜸해지고 만나는 사람이 제한되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에너지는 안으로 응집됐다. 친구들과 다양한 모임의 지인들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은 아름다운 글로 추억의 색을 입었다. 전국 사찰을 순례하며 기록해두었던 108산사의 기억과 간절한 기도를 다시 꺼내 마음 찾는 글로 채색했다. 정신이 더 혼미해지기 전에 내 삶을 정리해 수행 기록으로 엮어보겠다는 나의 서원은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60번째 생일에 맞춰 세상 밖으로 나왔다.

코로나로 인해 건강과 생계를 염려하는 아우성이 삼천리강산을 뒤덮어도 세상은 흘렀다. 봄꽃은 화사하게 피었고 불법에 대한 열망은 닫혔던 불교대학 문을 조심스럽게 열게 했다. 자가면역질환을 앓는 내가 외출한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지만 재적사찰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 담임 소임만큼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출현 직후부터 거의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한 일 년간의 시간은 불이문을 들어서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발목을 붙잡았던 것은 코로나 전파위협보다 마음의 불안이 더 컸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강과 개강을 반복하면서도 부처님 법을 향한 불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나도 봉사와 수행을 근근이 이어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등사 불교문화해설 활동은 거의 하지 못한 채 2년이 흘렀다. 그리고 올해 나는 내 뜻과 상관없이 불교문화해설팀 팀장이라는 새로운 소임을 맡게 되었다. 부담감과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어떻게 팀원을 이끌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도 전에 포교사단 일들이 쏟아졌다. 

전통문화를 무시하고 불교를 매도하는 민주당 국회의원의 망언에 국회의사당 앞으로 나가야 했고 도반들과 함께하는 규탄 시위의 행렬에 끼어야만 했다. 귀중한 우리 불교와 문화는 우리 스스로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칼바람이 털 코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체온을 끌어내려도 우리의 굳센 의지는 끌어내리지 못했다. 나와 똑같은 단복을 입고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 도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포교사들 항의에 이어 전국 각지 스님들도 종교 편향을 규탄하는 승려대회 참가를 위해 조계사에 모였다. 그토록 많은 스님이 집결한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질서정연하게 운집한 스님들 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심이 났다. 오랜 역사를 지켜온 우리 불교 앞날에 광명이 비추는 것 같았다. 내가 불자인 것이, 포교사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전국 승려대회 이후 포교사들은 또 하나 전법의 등불을 켰다. 새로운 신행문화 확산을 위해 “전법 ON”이라는 강령을 내걸고 걷기 순례 프로그램에 동참한 것이다. 서울 봉은사에 집결한 포교사들은 “우리는 포교사, 한국불교 지킴이, 포교는 수행, 수행은 포교”를 외치고, 미타사까지 이어지는 허응당보우의 길을 묵언하며 걸었다. 흙길이 아닌 콘크리트 보도를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렬로 쭉 이어져 걸어가는 도반 포교사들의 행렬을 보니 환희심이 차올랐다. 부처님 법을 따라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포교의 물결이었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코로나로 위축되었던 포교 활동의 불씨를 살려 다시 뭉친 불법의 물결이었다. 한참 걷다 보니 발바닥에서 알싸한 불편함이 올라왔다. 발바닥 압통이 올라올 때마다 맨발로 종일 묵묵히 걸으셨을 부처님이 떠올랐다. 길에서 태어나 끝없는 길을 걸으며 길에서 열반하신 부처님이 지금 이 길에서 내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상상을 하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막바지 미타사를 목전에 두고 동호대교를 건널 때는 세찬 강바람이 머리카락을 흩으며 사정없이 온몸을 훑어 내려갔다.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누구이며 왜 이 행렬에 끼어가는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발바닥 감각이 무뎌질 즈음 도심 속 아늑한 비구니 도량 미타사에 도착했다. 무사히 순례를 회향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극락전에 삼배를 올렸다. 

“오호 선재라, 너는 부처님의 법을 따라가는 제자이니라.” 

내 물음에 답하듯 아미타부처님의 음성이 귓전에 맴도는 것 같았다.

“스스로 불자임을 자각하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많은 사람이 내 뒤를 따른다고 생각하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이들이 바로 포교사들”이라는 포교원장 범해 스님 말씀은 옷깃을 여미게 했다. 포교사 품수를 처음 받았을 때처럼 마음은 변함없는데 몸에 걸친 포교사 단복이 오늘따라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졌다.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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