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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막내의 갑작스런 죽음, 절망과 슬픔 끝에 찾은 부처님

기자명 법보

총무원장상 - 김도연

속 깊고 따뜻했던 누나바라기…고통과 함께 가족시간은 그대로 멈춰
큰 슬픔에 어머니 한쪽 신장 기능 상실…법화경 사경하며 시련 극복
막내 살아보지 못한 시간 허비 미안…“행복한 꽃으로 피어나길”서원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17살 막내는 영정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백중이었다.

나는 대학 여름방학 내내 채소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휴대폰도 챙기지 않고 일하다가 숙소에 와서야 전화를 확인했다. 막내이모의 전화였다. 전화를 했더니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연아, 우리 재원이가 죽었대.” 

앞이 캄캄했다.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이모는 나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영정사진 속 막내 동생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가, 아가, 거기는 아직 네가 갈 자리가 아니잖니. 아까운 내 새끼, 예쁜 내 새끼.” 

어머니는 막내를 부르다가 혼절했다. 우리는 삼남매였다. 셋째인 막내는 손재주가 좋아 어머니 몰래 공사장을 다니며 돈을 모았다. 사고가 나기 전날까지 일하고 받은 수당을 어머니 손에 쥐어주며 예쁜 옷 한 벌 해 입으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제대로 된 나들이복 한 벌 없는 것을 속 깊은 막내는 알고 있었다. 

막내의 49재 후, 어머니는 밤마다 집을 뛰쳐나갔다. 막내가 자주 가던 놀이터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울었다. 아버지는 술로 견뎌내고 있었다. 동생이 다니던 고등학교 학생들의 모습만 봐도 눈물이 흘렀다. 우리 가족의 시간은 막내를 보냈던 2000년 여름에 멈춰버렸다.

나는 대학을 휴학하고 부모님 곁을 지켰다. 고된 시집살이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어머니에게서 웃음이 사라진 날들이 계속됐다. 막내를 잃은 충격으로 어머니는 20kg이 넘게 빠졌고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고열로 밤새 앓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을 때 의사선생님의 소견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쪽 신장이 스트레스로 기능을 상실한 것이었다.   

병원을 다녀 온 후 밥상을 올리면 “자식 먼저 보낸 어미는 죄인이다. 음식을 입에 넣는 게 부끄럽다”며 입에 대지 않으셨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이 지나고서야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이제 안 울게. 우리막내 극락왕생하라고 축원하고 기도 해 주자.” 

매일 어머니와 마주보고 108배를 했다. 어머니의 텅 빈 눈동자를 보면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108배를 마치는 고두례를 할 때면 “내 딸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했다. 막내에게 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일거라 생각했다. 

절 수행으로 어머니의 건강도 좋아졌다. 어머니는 절에 나가 기도를 시작하시더니 ‘법화경’ 사경을 하셨다. ‘법화경’을 한 번 사경하려면 사경공책을 7권이나 써야했다. 손가락 관절염을 앓고 계시는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다. 새벽잠이 없던 어머니는 5시 전에 일어나서 사경을 하셨다. 처음에는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사경 모습에 감화돼 나도 ‘법화경’ 사경을 시작했다. 어떤 날은 ‘법화경’ 속의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우는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경을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7권을 다 쓰는 동안, 마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소용돌이를 다 경험했다. 마지막 장 발원문에는 늘 이렇게 적었다. 

“누나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해. 부족한 누나 많이 사랑해 줘서 고마웠어. 네가 내 동생이어서 행복했어. 사랑해 재원아.” 

고3 수험생 시절, 날카로워 있을 때면 막내는 간식을 해주며 웃게 해 주었고, 무거운 물건도 들어주는 누나바라기였다.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생각만 해도 가슴이 한 구석이 아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16평 좁은 아파트에서 여덟 식구가 살았다. 넉넉하지 못했던 살림이라 막내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유별난 시부모에, 철없는 시동생, 까다로운 남편,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고 있는 큰아들과 까칠한 딸까지, 누구도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막내는 달랐다. 유독 살뜰하고 속 깊은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10번의 ‘법화경’ 사경을 마치던 날, 140권의 사경공책을 절에서 소지하면서 막내의 천도재를 지냈다. 한 글자 한 글자 140권에 절절하게 써 내려간 어머니와 나의 마음이 막내에게 닿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음에 문제가 생겼다. 언제든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취직해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마음을 잡지 못하겠거든, 몸을 먼저 다스려 보라”고 했다. 나는 삼천배를 할 수 있는 절을 찾아갔다. 법당에서 대중들과 함께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절을 했다. 막내가 살아보지 못한 소중한 하루를 허비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자정을 넘어 2천배를 넘어갈 무렵,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차라리, 나였으면 좋았을 텐데. 왜 네가 갔을까.’ 어머니 앞에서 꺼낼 수 없었던 마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참을 수 없게 감정이 일렁거리면서 무너져 내렸다. ‘이것밖에 못 되는 누나라서 미안해. 너무 보고 싶어.’ 삼천배가 다가올수록 체력은 한계가 왔고 잠깐 잠이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막내가 8살 꼬마의 모습으로 나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한걸음 다가가 손을 잡으려고 했을 때 환한 빛이 되어 사라지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알게 됐다. ‘아! 부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구나. 여기서 이 마음을 놓아야 막내가 좋은 곳으로 가겠구나.’ 신기하게도 그 후부터는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편안해 삼천배를 무사히 회향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20대의 긴 공백의 시간을 묻는 면접관들에게 나는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취업이 돼 서울에 올라오면서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사찰청년회에 가입했는데 큰 힘이 됐다. 또래 법우들과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이 많았다. 특히 봉축기간 동안에는 퇴근 후 장엄등을 채색배접하고, 봉축의 꽃인 연희단 율동과 퍼레이드 연습을 함께했다. 8차선 종로를 막고 동국대 운동장에서부터 종로까지 퍼레이드를 하면서 느꼈던 희열과 감동은 여전히 마음속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힘겨웠다. 하혈과 쉰 목소리가 낫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무조건 쉬라고 했다. 번아웃 증후군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봉정암으로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철야를 했던 봉정암 부처님 품에서 위로받고 싶었다. 봉정암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배낭에 챙겼다. 새로 정비한 봉정암 큰 법당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밤새 이어지는 스님의 독경에 맞춰 기도했다. 뜨거운 환희심이 일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108배를 하는데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마치 곁에서 부축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편안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구나!’ 한 생각 바꾸니 마음속 일렁이던 물결이 잔잔해졌다. 자정이 넘어 불사리탑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어스름 새벽이 오는 시간 석가모니불을 부르던 내 입술이 떨리더니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달빛을 이불삼아 부처님을 만나는 시간, 사시나무 떨듯 추위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누군가 실패라고 말할지도 모를 지금 내 상황은 그저 상황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내 모습 그대로가 삶이다.’ 내 안에 지혜가 깨어나 나에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부처님께 고백했다. ‘부처님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제가 원했던 것을 모두 빼앗겨 보고서야 행복을 알았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걸까요.’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누리는 것이구나! 그동안 의심했던 수많은 의문들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것 같았다. 새벽공기는 차가왔지만 아침 햇살은 따뜻했다. 한결 상쾌해진 마음으로 오세암으로 향했다. 철야를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봉정암을 오르기 전에 가졌던 많은 생각들이 어느새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따뜻한 엄마 품 같았던 오세암 부처님께 기도를 드릴 생각에 마냥 행복했다. 새벽을 여는 도량석을 들으며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새벽 예불 후 도량을 홀로 산책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시간을 죄책감 뒤에 숨어 흥청망청 쓰고 있지는 않았던가. 정말 절실하게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노력을 했던가.’ 나는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도반이 있는 절에 방문했는데 마침 삼천배 철야정진을 하고 있었다. 기도비도 내 주고 간식까지 챙겨줘서 삼천배를 끝까지 회향할 수 있었다. 도반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장경’을 독송하면 편안해졌다. 그래서 꼬박 두 달 지장기도를 했다. 묵직하고 단단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감싸주었다. 삶은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다른 한쪽 문을 열어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다. 억눌려 있던 솔직하고 진실한 감정을 마주하고 나니 마음속 응어리도 점차 풀렸다.   

내 자신을 하찮은 잡초라 불신하며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의심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도반의 모습으로, 좋은 이웃의 모습으로 늘 곁을 지켜주셨다.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던 날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께서 해 주셨던 법문의 한 구절은 아직도 지갑에 넣어 다닌다. “우리 마음 안에는 이 우주를 꽃으로 덮고도 남을 씨앗이 있습니다. 지금껏 돌보지 않았을 뿐이죠.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세요.” 

나는 지금 부처님 법 안에서 조금씩 피어나고 있다. 활짝 피어나 내 주변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길상인연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나 아닌 것,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모두 내려놓고 ‘참 나’를 찾아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싶다. 나만의 빛깔과 향기로, 꿈을 품은 행복한 꽃으로.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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