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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선과 악인악과?

기자명 황산 스님

착각 벗어나 세상 바로 보려면
경전·교리 세상 적용 연습해야
연기법 등한시하면 미혹 빠져
행복 다가서는 길은 지혜 쌓기

착한 사람이 부자가 아닌 것은 받아들이겠는데 악한 사람이 부자로 사는 것을 보면 너무 불쾌합니다. 과연 인과는 있을까요? 인과가 있다면 악한 이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세상일은 서로 맞지 않아 보입니다. 기대가 잘못된 걸까요? 세상이 불합리한 것일까요?

인과의 법칙은 연기법의 의거합니다. 연기법의 기본 정의는 ‘잡아함경’에 나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이 가르침은 상호작용을 의미합니다. 단 두 개가 서로 작용하면 작용 방향을 짐작할 수 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서로 작용합니다. 하나와 하나의 작용에서도 무명에 의한 의지 작용인 행(行)이 일어나고, 행은 물질적·정신적 상태인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의 작용으로 이어집니다. 이어서 고통을 회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애(愛), 그로 인해 생겨난 소유욕인 취(取), 소유욕으로 인해 지속되는 윤회적 삶의 방식인 유(有)가 현재의 원인이 되며, 이 셋으로 인해 중생으로 다시 태어나 윤회를 지속하는 생(生)과 노사(老死)의 미래 결과가 생겨납니다. 단 두 개의 작용도 파고들면 이렇게 복잡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데 이것이 무한대의 것들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니 연기의 이치는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중중무진하게 서로 주고받는 연기적 작용을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단순화시켜도 세상을 잘못 보게 됩니다. 요즘 정부의 인사청문회를 보니 악행과 편법, 특혜 등을 일삼아 재물과 권력을 취득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권력과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념에 의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더 지혜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견을 세우기 위해 경전과 교리를 공부하고 세상에 적용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기를 사유하며 연기적 작용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관찰해야 합니다. 연기적 작용을 사유하지 않으면 자기착각에 빠지고 상대를 오해합니다. 법문도 자기식으로 받아들여서 타인에게 전합니다. 사물을 보고 듣는 지혜가 맑으면 상대의 의도, 사물의 의도를 제대로 읽게 되며 전할 때도 오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탐욕과 어리석음, 아만과 고정관념 등으로 얼룩진 이들은 상황을 왜곡되게 보고 들고 말하며 물의를 일으킵니다. 

신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부자이거나 권력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 중에 왜 부자가 있을까요? 재물과 권력의 특성은 선악의 개념과 다른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움과 선함이 재물이나 권력적 마인드와 함께 어우러지면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훌륭한 일이 이뤄질 겁니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악함이 재물이나 권력과 합세하면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 할만큼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와 세상은 악하게 흘러갈 수도, 선하게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앞일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선해지고 악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악한 생각을 하면 나 혼자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많은 이들이 악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한 행동을 하게 되면 나와 비슷한 많은 이들도 선행하게 됩니다. 별업과 공업의 법칙으로 개별적 업도 있지만 동시에 공업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불법 공부를 등한시한다고 염려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내가 등한시하니 불법 공부를 등한시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입니다. 연기적 이치는 깊고 넓어서 끝없이 파고들며 관찰해야 합니다. 연기적 이치를 등한시하면 곧바로 미혹에 빠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길 같아도 연기적 이치를 궁구하면 할수록 환희심과 행복은 커집니다. 재물이 쌓이면 독이 될 수 있지만, 지혜는 쌓일수록 행복의 길로 다가설 수 있음을 새깁니다.

황산 스님 울산 황룡사 주지 hwangsanjigong@daum.net

[1632호 / 2022년 5월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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