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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견(正見)의 일상적 실천(1)

자기 경험과 지식 확신하는 순간 바른 판단 어려워

바른 판단 방해하는 요소는 탐·진·치이지만 더 근본 장애는 ‘앎’
확신은 고정관념에 갇힌 주관적 믿음…객관적 확실함과는 달라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와 유교 전통 ‘자절사’도 같은 맥락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하는 부처님, 인도 날란다, 11세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하는 부처님, 인도 날란다, 11세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Z세대 한 작가는 “인간으로 태어나 소비자로 자랐다”는 탄식으로 오늘날 소비지상의 세상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인이 되기는 쉬우나 불교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불교인이 되는 것은 나의 선택이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불교인답게’ 살아가는 것인지는 만만치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지만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일은 녹녹치 않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부족하다면 더 노력하면 된다. 교리나 가르침의 내용을 몰라서도 아니다.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 연기법(緣起法), 무아(無我) 등도 이해하고 있고 경전공부도 웬만큼 했다.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 ‘불교적’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팔정도의 첫 항목은 정견(正見)의 일상적 실천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바른 견해’를 뜻하는 정견은 팔정도 수행의 출발이자 토대이며, 또한 수행의 목적지인 바른 지혜를 뜻하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바른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불교인으로 살기 위한 전 과정에서 견지되어야 할 내용이다. 

정견의 일상적 실천을 염두에 둘 때, 바른 견해란 ‘특정한’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라는 무지(無知)를 인지하는 일이다. 견해는 사태를 이해하는 방식이면서 판단의 근거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바르게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린 경우도 있다.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최선의 노력만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이는 불교적 맥락에서 보더라도 그리 어긋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바른 견해란 바르게 판단하고 최선의 노력을 위한 첫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른 견해 그리고 바르게 판단하는 일을 방애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탐·진·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욕망이 바른 판단을 장애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돈에 눈이 멀어” “사랑에 눈이 멀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욕망이 우리의 바른 판단을 장애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재물이든 명예이든 혹은 성적(性的)인 것이든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욕망을 달성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번째로 우리의 판단을 장애하는 것은 분노다. 분노는 분개와 다르다. 분개는 정당하지 못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감의 발로이지만 분노는 시기 질투의 소산이다. 분노로서는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세상도 자신도 바로 잡지 못한다. 분노를 표현할 때 “앞뒤 가리지 않고”라는 말을 쓴다. 사태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분노의 결과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과 분노의 문제는 주로 개인 인격의 문제이기도 하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쉽게 알아차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절이 가능한 문제들이다. 우리의 바른 판단을 장애하는 보다 근본적인 장애는 바로 ‘앎’이다. 몰라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섣부르게 아는 것이 바른 판단의 장애가 된다. 욕망과 분노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섣부른 앎은 우리의 ‘귀’를 닫게 한다. 내가 해 본 ‘경험’, 내가 읽어서 아는 ‘지식’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개인이나 조직의 잘못된 판단의 대부분은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했거나 읽고 배운 것 외에 다른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확신의 무지’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가진 ‘확신의 무지’를 지적했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은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강조한 말이었다. 

확신하고 단정하는 것에 대한 경계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는 생전에 다음 네 가지를 결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통칭해서 자절사(子絶四)라고 하는데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가 그것이다. 요컨대 ‘단정하거나 치우친 판단’이 없고, ‘반드시 그러하다는 집착’이 없으며, ‘자신이 옳다는 완고한 고집’ 이나 ‘자신만을 내세우는 아집’이 없었다는 것이다. 

‘확신’(certitude)은 확실함(certainty)과 다르다. 확신이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기반 한 주관적 믿음일 뿐이다. 반면 객관적 확실함이란 엄밀하게 말한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신(神)의 영역’이고 깨달은 자의 전지적(全知的) 살반야(薩般若)의 영역이다. 

원효가 그의 화쟁론을 설파하는 가운데 제시하고 있는 ‘장님과 코끼리’의 예화는 경험과 지식에 갇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님들은 자신이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주장하고 배를 만진 또 다른 장님은 “코끼리는 벽과 같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결코 온전한 코끼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에 다가 갈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입’이 아니라 ‘귀’를 열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에 조금씩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예화에서 ‘장님’이란 ‘코끼리’의 전모를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코끼리’는 함께 모색해야할 ‘진실’ 혹은 ‘옳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사회라면 공동선일 것이고 회사와 같은 조직이라면 당면한 현안에 대한 최선의 올바른 결정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만 주장하면서 ‘입’만 열고 ‘귀’를 열지 않는다면 여러 의견들은 그냥 소음일 뿐 문제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내가 만진 것만이 코끼리라는 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견(正見)을 일상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결코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다. ‘더 향상 된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 곧 팔정도(八正道)의 첫 출발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35호 / 2022년 6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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