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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속도 시속 40km

거실 탁자 위에 낯선 봉투 두 개가 놓여 있다. 발송인은 동부경찰서이고 수취인은 내 이름이다. 놀라서 뜯어보니 제목이 길었다. ‘위반 사실 통지 및 과태료 부과 사전 통지서’. 일주일 사이에 두 번이나 같은 장소에서 교통 법규를 위반했다는 사실을 한꺼번에 통보한 일종의 내용증명서였다.

서너 달 사이에 벌써 대여섯 번째다. 위반 장소와 시간이 무미한 건조체로 적혀 있고, 아래 칸에는 벌금 액수가 볼썽사납게 박혀 있었다. 원인 제공의 현장은 바로 그때 그 자리였다. 남산 2호 터널을 나오자마자 녹사평역 방향으로 이어지는 지하차도 입구까지 채 50m가 안 되는 구간이다. 터널 안의 제한 속도인 시속 40km를 지하차도 입구까지 유지하지 못한 업보였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경찰서 교통계로 직접 나와서 CCTV를 확인하라는 친절한 안내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의제기는 무슨. 가보나 마나 선명하게 찍힌 디지털 증거가 나를 압도할 것이 분명했다.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일이 있을 때는 차를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대개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에 귀가하다 보니 텅 빈 터널 안을 시속 40km 이하로 운행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모르게 제한 속도를 초과하게 되는 것 같다. 예전처럼 교통순경이 있었다면 이런 사정은 좀 봐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이제 그 세상이 아니다. 감시 카메라는 처음부터 가슴이 없었다. 설계된 대로 빈틈없이 작동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규정된 속도를 어기면 차가운 머리로 자동차 번호판을 영상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것이 기계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사람도 사리(事理)가 분명한 사람이 오히려 우정(友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예부터 다정(多情)은 고질적인 병이었다. 교통 법규위반 통지서를 받은 것은 나의 잘못으로 빚어진 일이지 CCTV가 나를 미워해서 앙갚음한 것은 아니다. 인과관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날 뿐이다. 어디 교통 법규위반뿐이겠는가 마는. 운전할 때는 도로 규정만 준수해도 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지켜야 할 사회규범이 훨씬 더 많다. 

불교에서는 행위의 의도를 도덕적 판단의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업보의 원인을 만든다. 업은 반드시 업보를 수반한다. 그것은 심오한 종교의 ‘진리’가 아니라 소박한 자연의 ‘원리’다. 업은 업보와 동전의 양면을 공유한다. 한쪽이 업의 싹을 심으면 다른 쪽에는 업보의 열매가 맺힌다. 어제의 일이 부끄러우면 오늘은 떳떳하게 살려고 해야 내일의 햇살이 두렵지 않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법규를 계속 위반하는 것은 정념(正念)과 거리가 먼 삶이다. 정념이 안 되는 사람은 아직도 무명(無明) 속에서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날아든 두 장의 과태료 통지서가 꾸뻑 졸고 있던 나에게 따끔한 죽비를 내렸다. 솔직히 몸과 입과 마음이 시시각각 빚어내는 나의 행동이 오계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동안 몸으로 하거나 입이나 마음으로 지은 악업이 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잦은 법규위반은 멍청한 ‘마음’과 한심한 ‘몸’이 합작해서 만든 ‘업’과 그것의 당연한 ‘업보’였다. 적극적인 의도가 없었을지 몰라도 무의식적인 안일함이 적어도 소극적인 의도로 작용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누가 이런 시간에 제한 속도를 지키겠느냐고 투덜댔다면 불자로서 또 다른 의업(意業)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터널 속의 제한 속도는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악법(惡法)도 아니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제정한 서울시의 교통 법규를 내가 함부로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는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수많은 ‘제한 속도 40km’의 지뢰밭을 피해 가는 일만 남았다. 순간 집보살의 눈치를 의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참회의식은 108배가 아니었다. 스마트폰의 앱을 열고 경찰서 지정 은행 계좌로 잽싸게 거금 6만원을 송금했다. 교통 법규를 지켰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36호 / 2022년 6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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