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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33)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16)

의상계가 화엄종 주류 되면서 원효의 화엄 관련 저술 완전히 잊혀

의상 귀국 이전 원효에게 화엄경은 여러 경전 중 하나에 불과
현존 화엄경소도 동문선 수록 서문과 일본 필사본 3권이 전부
서문에는 불교와 노장사상 넘나들며 대승교의를 탁월하게 설명  

고판본 동문선 권83 3-4면 진역화엄경소서 부분.[국사편찬위원회]

670년 의상의 귀국으로 화엄학 전래는 원효불교에도 새 변곡점이 되었다. 원효불교의 사상은 여러 차례의 변화를 거쳤지만 불교내용이 바뀌거나 교체되는 과정이 아니라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심화되는 과정이었다. 원효는 631년 15세 즈음 출가하여 17~8년 동안 삼론종·열반종·섭론종 등 구역불교를 섭렵하였고, 648년 32세 즈음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신역경전을 접하면서 구역불교 토대 위에 유식학을 중심으로 하는 신역불교의 이해를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공·유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경전으로서 ‘대승기신론’의 의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신역불교의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해 두 차례나 당에 유학을 시도하는 도중에 661년 45세 때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 즈음에 태종무열왕의 주선으로 요석공주와 결혼하고 안정된 상황에서 10여 년 동안 저술에 몰두하여 마침내 중관·유식을 통합하는 불교사상체계와 실천원리를 수립하게 되었다. 오늘날 원효의 대중교화 활동만을 주목한 나머지 원효의 저술가·사상가로서의 진면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한 태종무열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엘리트계층과의 관계를 간과하는 일방적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원효는 670년 54세 때 불교사상가로서 일가를 이룬 토대 위에 의상에 의해 전해온 화엄학을 접하면서 그의 불교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의상의 귀국 이전까지 원효는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고 주석하는 가운데 ‘화엄경’을 특별히 중요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670년 이전의 저술인 ‘대승기신론소’ 서문인 ‘제1표종체자’에서는 ‘대승기신론’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가운데 여러 종류의 경전을 나열하고 있었는데, ‘화엄경’은 여러 경전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대승기신론’의) 서술한 바는 넓지만 간략하게 말할 수 있다. 일심(一心)에서 이문(二門)을 열어서 마라백팔(摩羅百八)의 넓은 가르침(필자주:楞伽經)을 총괄하였으며, 현상의 물든 것(相染)에서 본성의 깨끗함(性淨)을 보여 유사십오(踰闍十五)의 깊은 뜻(필자주:勝鬘經)을 널리 종합하였다. 그 밖에 곡림일미(鵠林一味)의 종지(필자주:涅槃經), 취산무이(鷲山無二)의 취지(필자주:法華經), ‘금고경(金鼓經,金光明經)’과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의 삼신극과(三身極果), ‘화엄경’과 ‘보살영락경’의 사계(四階)의 깊은 원인, ‘대품반야경’과 ‘대방등대집경’의 넓고 호탕한 지극한 도리, ‘대승대방등일장경’과 ‘대방등대집월장경’의 은밀한 현문(玄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 가운데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것은 오직 이 ‘기신론’뿐이다.”

이 문단에서 원효의 취지는 ‘대승기신론’의 의의를 강조하여 ‘능가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의 여러 법문을 모두 겸해서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엄경’을 특별히 강조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8종의 열거된 경전 가운데 여섯 번째로 든 것을 보면 그들 경전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원효가 ‘대승기신론’을 주석할 당시에 8종의 경전 가운데 제일 중요시한 것은 첫 번째로 열거한 ‘능가경’이었다. 원효는 ‘능가경’을 ‘대승기신론’의 소의경전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실제 ‘별기’와 ‘소’ 두 주석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한 경전이 ‘4권능가경’(‘별기’17회·‘소’5회), ‘10권(입)능가경’(‘별기’16회·‘소’6회), ‘능가경’(‘소’3회) 등이었다. 반면 ‘화엄경’은 ‘별기’에서 3회, ‘소’에서 7회의 인용에 그치었다. 그밖에 다른 저술에서도 ‘화엄경’을 다수 인용한 문헌은 없으며, 의상 귀국 이전에 ‘화엄경’을 특별히 중시했다는 언급도 없다. 

예외적으로 원효의 저술 가운데 ‘영락본업경소’에서 ‘화엄경’을 20회나 인용하고 있으며, “대경(大經)”이라고 호칭하는 예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보살영락본업경’을 ‘화엄경’의 지류로 인식한 것과 관련된다. 앞에 인용한 ‘소’의 문구에서도 “‘화엄경’과 ‘영락경’의 사계(四階)의 깊은 원인”이라고 병칭하여 동류의 경전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가 ‘소’에서 ‘화엄경’과 ‘영락경’의 두 경전을 동류의 경전으로 묶은 것은 함께 보살의 행위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락경’은 ‘화엄경’의 영향과 ‘범망경’ 등에 기반을 두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화엄경’과 교설의 내용이 비슷한 것은 당연하다. 원효는 ‘소’에서 동류로 다루는데 그치었으나, 말기의 ‘화엄경소’ 같은 저술의 교판론에서는 일승분교(一乘分敎)에 ‘영락경’과 ‘범망경’, 일승만교(一乘滿敎)에 ‘화엄경’을 배당하여 같은 일승에 속하면서도, 다시 분교와 만교로 구분하였다. 원효의 교판론은 뒤에 별도로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우선 중국 화엄종의 지엄, 그리고 그를 계승한 의상은 ‘영락경’을 삼승으로 분류함으로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지적한다.

원효의 ‘화엄경’에 대한 평가가 두드러지게 높아진 것은 의상의 귀국 이후임이 분명하며, ‘화엄경’에 대한 원효 말년의 저술임도 긍정할 수 있다. 원효의 ‘화엄경소’ 10권(또는 8권)의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의거하여 원효 말년 분황사에 머물면서 저술하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하였다는 사실이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원효 행적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로 신빙성이 높은 ‘고선사서당화상비’에 원효가 왕궁에서 생활하다가 말년에 혈사(穴寺)라는 작은 절로 옮겨가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말년까지 집필에 몰두하는 학자로서의 모습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원효의 대중교화의 행적과 관련하여 아미타정토신앙이 강조되고 있으나, 원효의 저술들, 즉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본업경소’ 등에서부터 말년의 ‘화엄경소’에 이르기까지 실천론으로써 보살수행의 5문(施·戒·忍·進·止觀) 가운데 특히 지(止)와 관(觀) 두 날개를 함께 움직여야 함(止觀雙運)을 일관되게 강조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의 행적과 불교사상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할 때에 대중교화사·포교사와 저술가·사상가, 정토신앙과 지관의 실천수행, 일반서민층과 엘리트지배층과의 관계 속에서 균형된 시각의 새로운 접근법이 요구된다.

원효의 화엄 관련 저술은 ‘화엄경소’ 10권을 비롯해 ‘화엄경종요’1권, ‘화엄강목’1권, ‘화엄경입법계품초’2권, ‘보법기’1권, ‘일도장’1권, ‘대승관행’1권 등 7부 17권의 이름이 전해오지만, 현존하는 것은 ‘화엄경소’뿐이다. 원효 전후 신라인의 화엄 관련 저술은 의상과 법손들의 저술이 대부분이고, 그 밖에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4권(혹은 5권), 명효의 ‘해인삼매론’1권, 태현의 ‘화엄경고적기’10권, 연기의 ‘화엄경요결’12권(혹6권), ‘화엄경진류환원낙도’1권, ‘화엄경개종결의’30권, 견등의 ‘화엄일승성불묘의’1권, 의륭의 ‘화엄경석명장’1권, 범여의 ‘화엄경요결’6권(혹은 3권), 가귀의 ‘화엄경의강’1권, ‘심원장’ 1권 등을 확인할 수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표원과 명효의 저술 2종뿐이다. 7~8세기 신라인들의 유식학 연구가 활발하여 당 불교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사실에 비하여 의상의 직계 법손 이외에의 화엄학 연구가 대단히 부진한 결과였다. 더욱 8세기 중엽 이후 화엄종은 의상계가 주류가 되면서 의상의 ‘일승법계도기’에 대한 번쇄한 주석에 집중하게 되고, 또한 의상계 이외의 화엄학 연구는 쇠퇴함으로서 화엄학 연구는 단절되고 말았다. 한국불교사에서 화엄종은 종파로서는 교종의 주류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여 왔으나, 교학의 연구는 부진하였고, ‘화엄경’의 텍스트로서는 중국의 법장과 징관, 이통현 등의 주석서만이 읽혀져 오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불교사 전통에서 원효의 화엄 관계 저술도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3부12권만이 기록되었을 뿐이고, 그 뒤에는 완전히 잊히고 말았다. 원효의 화엄 관계 저술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화엄경소’는 16세기에 편찬된 ‘동문선’에 수록된 서문과 일본에 필사본으로 전하는 제3권뿐이다. ‘화엄경’ 제3권은 간문(寬文) 10년(1670) 7월9일 일본 고산사(高山寺) 석수원(石水院)에서 필사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 제85권에 수록되었고, ‘한국불교전서’에서 이것을 저본으로, ‘동문선’의 서문을 함께 실어 전하게 됐다.

원효의 ‘화엄경소’ 10권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제3권 ‘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에 대한 주석 부분뿐이지만, 일찍이 신라에서는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 당의 법장의 ‘화엄경탐현기’, 혜원의 ‘간정기’, 이통현의 ‘신화엄경론’, 징관의 ‘화엄경소’ 등 화엄 관련 문헌 가운데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원효의 교판론이 주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 교판론 문제는 별도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는 ‘화엄경소’ 서문의 내용만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서문은 비록 짧은 글이지만 원효의 화엄경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 ‘동문선’에는 이 ‘화엄경소서’ 이외에도 ‘금강삼매경론서’ ‘법화경종요서’ ‘본업경소서’ ‘열반경종요서’ ‘해심밀경소서’ 등 6편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불교적인 내용보다 유려한 한문체로서 현학적인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문학적인 표현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서문에는 ‘유마경’ 같은 불교경전만이 아니라 ‘도덕경’이나 ‘장자’ 등의 노장사상 용어를 가져와 역설적인 논리와 부정의 부정 논리를 구사함으로써 불가사의한 대승 교의의 특징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원효의 젊은 시절 교유했던 인물 가운데 승조(僧肇)의 후신으로 자처했던 혜공 등을 통해 노장철학에도 조예가 깊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의 ‘화엄경소’ 서문에서도 수미산과 겨자씨, 방장과 중좌의 비유 같은 ‘유마경’의 역설적인 논리를 구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자’의 추수(秋水)편이나 소요유(逍遙遊)편의 비유를 활용하여 ‘화엄경’의 장대하고 자재한 세계를 칭송하고, ‘화엄경’과 일체 경전의 관계를 설정하여 ‘화엄경’ 이외의 “얕고 가까운 교문”은 낮은 근기에 응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설파하였다. 원효는 특유의 논리를 사용하여 ‘화엄경’은 막힘없고 걸림 없는 법계의 법문이며, 원만하고 위없는 돈교의 법문이라고 정의하였다. 법장의 ‘화엄경탐현기’에서의 원교만을 강조하고 돈교를 낮게 규정하여 ‘화엄경’으로부터 분리한 주장과는 구분된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7자의 제목을 풀이하여 법계의 무한(無限)함이 “대방광”이며, 행덕의 무변(無邊)함이 “불화엄”이라고 하여 대방광을 증득할 법으로 보고, 불화엄을 증득하는 주체로 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대방이 아니면 불화를 넓힐 수 없고, 불화가 아니면 대방을 장엄할 수 없다고 하여 ‘화엄경’의 근본 뜻이 “광(廣)”과 “엄(嚴)”이라고 정의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37호 / 2022년 6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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