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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길상사 주지 자인 스님

산속 바위굴 1000일 관음정진 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눔 있다!” 

부산 선암사서 만난 고승
‘맑은 눈’에 신선한 충격

꿈속 노인 3일 연속 출현
“마음 내고 몸 안 움직이나!” 

중학교 입학시험 안 치르고
열 네 살에 산문 열고 출가

만어산 줄기 천연 바위굴 
양식은 보리쌀과 된장뿐

자비암 이어 길상사 창건
이주노동자들의 ‘쉼터’

재소자 교화에도 30여년
“최악 범죄자 마음 바뀐다”

화엄승가회 7년간 이끌며
자살예방‧대불련 전격지원

사찰 건축불사 지양하고
나눔예산 확보 영역 확대

부산 길상사 주지 자인 스님은 “나눔은 행복”이라며 “소욕지족의 삶을 지향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제 눈에는 가장 아름답다”고 전했다.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법정 스님 역 ‘숫타니파타’)

밀양 만어산(萬魚山·670m) 7부 능선 자락의 바위굴에 들어앉았다.(1980) 굴 안으로 세차게 들어오는 엄동설한의 찬 바람을 막는 건 소나무 잔가지와 억새를 엮고 그 위에 비닐로 덮은 문뿐이다. 침구는 없다. 입고 있는 누비옷이 이불이고 바닥에 깔아 놓은 억새가 요다. 1000일 관음기도 회향 전까지 산에서 내려가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웠기에 양식은 속가의 형님에게 부탁했는데 보리쌀과 된장 이외에는 절대 가져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낙엽 위에 쌓인 눈이 봄기운에 녹아 야생화를 움트게 하고, 가을에 내린 낙엽 위로 다시 하얗게 쌓이는 동안 수행자의 고독도 깊어갔다.

고향 밀양에서 유년을 보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덜컥 떨어지고는 부산 친척 집에 머물며 학원에 다녔다. 꽃들이 한창 피어날 때 부산 선암사에 올랐는데 거기서 도량을 거닐던 한 스님을 마주했다. 작은 체구임에도 눈이 맑아 신선처럼 보였다. 그 순간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수행하면 나도 저 스님처럼 맑아질 수 있을까?”

교과서 펴는 일이 줄어 가더니 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점점 무거워졌다. 입학과 출가 경계에서 3개월을 방황했다. 시험 날이 가까워 와 마음을 다잡으려 할 때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꾸짖었다.

“이놈. 마음은 내고 몸은 왜 안 움직이나!”

12시에서 1시 사이 똑같은 꿈을 3일 연속 꾸었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공부 안 하고 왜 왔느냐?” 물었고 아들은 “입학시험 관련 서류를 준비하러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한 올의 의심도 없었는지, 아님 무엇인가를 직감했는지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마음속으로 인사를 올렸다. 

“이제 저는 아버지, 어머니 곁을 떠납니다.”

열네 살의 소년이 산문을 열고 사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1964년 10월이다. 봉암 자인(鳳庵 慈忍) 스님이다. 

1980년 토굴에서의 단독 정진 결단을 내렸다. 선원에서의 3년 정진 경험도 있던 터라 자신 있었다. 장좌불와를 결심한 건 아니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잤다. 그러나 하루 세끼 이상의 공양을 한 적이 없고 하루 6시간 이상을 자본적 또한 없다. 깨어있는 순간에는 관음 기도에 온전히 몰입했다. 가끔 스쳐 가는 산바람이 잊고 있던 청량함의 묘미를 일깨웠고, 한밤중에 뜬 달이 제 모양을 바꿔가며 무상을 일러주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잔별이 늘 반겨주었기에 고독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1000일 관음기도’ 회향에 다다를 즈음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의 열 번째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떠올랐다. 복과 덕이 가득한 포대를 지팡이에 메고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그 모습이다. 
 

부산 길상사 전경.
부산 길상사 전경.

산에서 내려온 자인 스님은 1983년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 포교당 ‘자비암’을 마련해 17년 동안 법을 전한 후 2000년 10월 부산 강서구에 길상사(吉祥寺)를 세웠다. 만어산에서 메고 온 포대에서 꺼낸 건 ‘나눔’이다. 이것은 자인 스님의 법납 58년 여정을 관통한다. 

부모님과 마주한 건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위해 밀양을 찾았을 때다. 2남 2녀 중의 세 번째인 아들에 거는 기대가 컸었는데 승복을 입고 나타났으니 아쉬움과 걱정으로 심란했을 터다. 손수 우려낸 차를 한 잔 머금고는 다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회고했다. 

“어머니 얼굴에서 수심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는데 얼마 후 조용히 당부하셨습니다. ‘너 스스로 길을 찾았으니 승려 생활 제대로 해라!’ 그 말씀 33개의 척량골(脊梁骨)에 또렷이 새겼습니다.”

자신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한 ‘나’를 찾고자 바위굴에 들어갔을 터다. 

“호기롭게 앉았지만 이내 망념이 들곤 했는데 극복하고 나니 정진에 힘이 붙으며 내 마음을 볼 기회가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러한 시간이 켜켜이 쌓이는 동안 나 자신이 맑아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역시 내려놓고 비워야 했습니다. 시비분별의 바깥 경계가 허물어지며 내가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살다 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홀로 앉아 있는 동굴에서 한마디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눔 있다!’ 심우도의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명료하게 떠올랐습니다.”

만어산에서 내려온 스님은 ‘포교 노하우’를 알고 싶어 부산불교교육대학 1기로 입학했다. 조계종 포교사 고시 전국 최다 합격자를 배출한 그 대학이다. 입학 직후 불사 계획이 잡혀 6개월만 다녔다. 2015년 부산불교교육대학 출신 모임 ‘화엄승가회’가 창립됐는데 자인 스님이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해 40여명의 회원이 가입했다.

OECD 국가 중 대한민국은 자살률 1위 국가로 기록되곤 했다. 자살 예방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화엄승가회는 2017년부터 재래시장 중심의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자인 스님 판단에 의미는 깊었지만 효과는 약한 듯했다. 그때 스리랑카에서 지켜본 탁발이 떠올랐다. 하여 발우를 들고 여법하게 걷기로 했다. 동행한 재가불자가 탁발행렬 맨 앞에서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팻말을 들었다. 또 다른 재가불자들은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 주었다. 낯선 탁발에 이목이 집중되며 호응이 좋았다. 그해에만 전단지 2만장을 나눠 주었다. 이 탁발은 코로나19가 엄습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2015년 기준으로 불살생계를 지향하는 불교 신자 1000만 명이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살한 사람이 안고 있던 고통을 산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살 충동이 일어난 그 순간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생명의 지중함을 알아차린다면 그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삶과 존재 의미를 자신에게 묻고 답해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코로나19로 중단된 탁발은 올해 재개한다. 아울러 명상 걷기를 하며 휴지 등의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plogging)을 자인 스님은 검토하고 있다,

화엄승가회는 부산지역 대학 불교 동아리를 지원하고 있다. 한 학교당 한 해 100만원이다. 부산‧동아‧대동‧부경‧동명‧해양대 6개 대학을 지원해 오다 2021년에는 7개 대학, 2022년에는 8개 대학으로 늘렸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불련 활동이 활발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며 주춤하더니 2010년 전후로 불교 동아리들이 급격히 문을 닫았습니다. 종교 무관심, 학점 관리, 취업 준비 등이 주요인이겠지요. 그렇다고 관망‧외면하면 대불련은 무너지고 재건은 불가능합니다. 작더라도 지속으로 불어넣는 동력이 필요합니다.” 

자인 스님은 부산교도소 교정위원을 30여년 동안 맡으며 재소자 교화에 진력하고 있다. 길상사 신행단체인 관음회 등과 함께 1년에 10회 교도소를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150만원에 200만원 상당의 떡과 과일, 과자 등을 준비했다. 때로는 영치금도 넣는다. 재소자 교화에 힘쓰는 단체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제는 1년에 5회 정도 들어간다. 아울러 37년의 역사를 써온 부산교도소 교정교화 법사단(단장 역임)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종교인들이 재소자들에 다가가는 건 ‘최악의 범죄자 심성도 변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 신념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구금이 주는 고립‧소외감, 장래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심적 안정을 못 찾는 재소자일수록 종교를 가지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가가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을 성찰하고, 그 깊이에 따라 자비심을 일으킵니다. 그들 곁에도 누군가 서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건 위로의 시작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출소 후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연등을 단다며 절에 온 그들의 환한 미소를 보며 보람을 느낍니다.”

자인 스님의 원력을 오랫동안 지켜본 화엄승가회가 이 불사에 뛰어들었다. 화엄회는 6월22일 처음으로 부산교도소를 방문한다.

길상사에서 차량으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녹산‧화전‧신호공단이 있다. 태국, 몽골, 미얀마. 베트남, 스리랑카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 오늘도 땀 흘리는 곳이다. 불자 이주노동자들에게 길상사는 고된 삶을 내려놓는 쉼터이자 모국에서 안고 온 불심을 더욱 돈독히 해가는 고향 같은 도량이다. 
 

자인 스님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자인 스님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자인 스님은 그들에게 한국 기본예절과 붓글씨, 참선을 지도하며 성지순례도 이끌어 주고 있다. 소송이 붙으면 한국어에 서툰 이주노동자 대신 법정에서 변호할 정도로 열성을 보인다. 한때 공단을 찾아가 그곳 실무자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이 머무는 숙소의 청결을 부탁한 적이 있다. “스님이 웬 참견이시냐?”는 핀잔을 들었지만 잔잔한 어조로 뜻을 전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초파일을 맞이해 연등을 만들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초파일을 맞이해 연등을 만들고 있다. 

“항의하러 온 게 아니라 간청하려 걸음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뜨거운 중동으로 건너가 아들, 딸의 학비를 보냈고, 미국의 어두운 지하 탄광에서도 고국의 가족을 그리며 희망을 캤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그들의 삶의 결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 이후 숙소는 차츰 쾌적해 갔습니다.”

자인 스님은 이외에도 사회 그늘진 곳에서 힘겨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불우이웃에게도 용기를 심어 주고 있다. 아울러 통도사 종립고등학교인 해동고등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해동원효장학회(2008년 창립)의 총무를 15년째 맡아오고 있으며 생명나눔실천 부산지역 부본부장직도 수행하고 있다.

자인 스님의 나눔 행보를 보면 만만치 않은 예산이 투입될 건 분명한데 어찌 충당하는지 의아했다. 

“1년 내내 절에 들어오는 보시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떼어 놓습니다. 우리 절에는 아직 탑이 없는데 다음 주지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의 건축 불사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회에 환원할 금액도 그만큼 늘겠지요. 나눔은 행복입니다. 소욕지족의 삶을 지향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제 눈에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욕망‧이기로만 치달은 기차는 결국 선로에서 이탈합니다.”

불자들과 함께 음미하고 싶은 일구를 청하니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한 대목을 전했다. 

‘어떤 악도 짓지 말고(諸惡莫作) 착한 것은 모두 봉행하라.(衆善奉行)’ 

세 살 아이도 알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는 그 게송이다.

자신이 설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 온 자인 스님이다. ‘숫타니타파’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얼룩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자유로이 숲속을 거닐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자인 스님은
현재 화엄승가회회장. 부산교도소 교정위원, 생명나눔실천 부산지역본부 부본부장, 해동고 원효장학회 총무 등을 맡고 있다. 

[1637호 / 2022년 6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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