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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바짓단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노는 즐거움을 만끽할 때가 있다. 나의 혼자 놀기는 다른 사람의 바지 끝을 눈여겨봤다가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재미있어하는 일이다. 한동안 우리나라 남성들의 바짓단 길이가 조금만 더 짧았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적이 있다. 쓸데없고 우스꽝스러운 관심사였다고나 할까. 바지는 길면 답답하고 짧으면 경망스럽다. 20대부터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바지를 짧게 입고 다녔다. 발목의 복숭아뼈가 살짝 보이도록 입어야 깔끔하고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유난 떤다고 언짢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바지가 짧은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바지가 너무 길다고 대꾸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멋쩍은 헛웃음만 나온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대통령이 바지를 거꾸로 돌려 입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누가 봐도 대통령의 바지는 통이 지나치게 넓고 기장도 걸리적거린다. 어쩌면 이런 풍성한 바지 스타일이 웃지 못할 소동을 빚게 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바지를 너무 펑퍼짐하게 입은 업보(業報)라면 업보일 테다. 대통령의 옷을 만든 디자이너도 대통령에게 바지의 품을 조금만 줄이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옷을 입을 자유가 있다. 말하나 마나다. 다만 대통령을 비롯한 공인들은 패션을 통해 자신의 철학이나 정책을 홍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순전히 개인적인 시각에서만 보면 대통령의 말실수는 넉넉한 바지통과 구두를 덮는 바지 기장에서 나오는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대통령의 무게감을 애써 거부하고 싶은 대통령의 인간적인 몸짓을 읽는다. 하지만 대통령의 바지가 앞뒤 구분이 안 된다고 놀림을 받는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경험상 바지의 둘레와 장단만 적당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남의 바짓단 길이나 품평하는 악취미(惡趣味)는 그야말로 나만의 놀이에 불과하다. 확대해석하지는 마시길. 조심스러워서 요즘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그만하면 아주 멋지다고. 이 한마디 말만으로도 얼마나 유쾌·통쾌·상쾌한지 모른다. 그 와중에 나는 상대방의 성격을 미리 짐작하거나 일찌감치 예단해버린다. 뭐, 맞거나 말거나다. 까짓것 내친김에 거창하게 말해 버릴까 보다. 나는 바지의 길이에서 일상 속의 중도(中道)와 중용(中庸)의 가치를 충분히 체감(體感)한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바지 길이를 선택하는 마음이 곧 붓다의 중도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 될 수 있음을. 대통령의 체형이 평균적인 사람들과 크게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바지가 너무 펄렁거리거나 구두를 덮고 있는 바짓단은 조금 변화를 줬으면 좋겠다. 같은 스타일을 계속 고집하면 왠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혹시라도 선악(善惡)의 관점에서 피의자를 다루던 검사의 정의론적 고정관념이 남아 있는 흔적이라면 당장이라도 고쳐야 할 인식과 태도다. 국민은 공정과 상식을 넘어 상생과 화합의 대통령을 원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정장이 운동복처럼 편하게만 보이면 곤란하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대통령은 막중한 자리다. 대통령의 옷차림에서 지금보다 더 절제와 금욕의 미덕이 묻어났으면 좋겠다. 간혹 대통령으로서의 ’제대로‘보다 성공한 남성의 ’멋대로‘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아 불안하다. 국민은 대통령의 말과 표정 그리고 걸음걸이와 손동작에서도 국민의 대표다운 품격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대통령의 절제되고 긴장된 옷차림은 국민에게 안정감을 주는 무언의 메시지다. 이런 작은 마음의 준비 하나하나가 성공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마디만 더하면. 집을 나서기 전 나를 비추는 거울 속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몸에 걸친 오늘의 의상(衣裳)만 보일 뿐이다. 옷이 몸의 장식(裝飾)이기에 앞서 정신의 외화(外化)이기도 한 이유다. 잠시 ‘혼잣말’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나 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 오늘 하루도 꼭 행복하시길.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41호 / 2022년 7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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