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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고대불교-삼국통일과 불교(35)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18)

원효 4교판설은 대승기신론의 일심 사상에 이은 두 번째 최후 결론

최근 4교설 이해는 당시의 시대상과 원효사상 변화 담지 못해
의상 귀국 후 지엄 문제의식 신라에 전해져 원효와 공감대 형성
4교설은 화엄경소에 서술됐으나 일실… 당 스님들 저술로 확인  

신라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 권4 분교의, 제3 문답. 원효의 4교설이 수록돼 있다.
신라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 권4 분교의, 제3 문답. 원효의 4교설이 수록돼 있다.

앞 회에서는 원효의 불교사상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써 그의 교판설을 검토하였다. 원효 교판설에서는 남북조시대 이후의 다양한 경전의 해석 방법과 교판설을 폭넓게 섭렵하고, 총체적인 불교사상체계 속에서 각 경전 나름대로의 의의를 평가하고 회통하는 원효 특유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등이 ‘화엄경’과 마찬가지로 구경요의경이라고 판석하는 것에 그침으로서 원효 독자의 체계적인 교판설이라고는 평가될 수 없다. 그리고 남·북 교판설의 차이, 특히 중관학파 계통의 삼론종과 유식학파 계통의 법상종의 교판상의 대립을 회통시키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최초의 혜관의 교판설이래 중요시되어 왔던 ‘화엄경’의 특별한 교판적 위치는 아직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의 종체문에서 대승경전들을 8부로 나누고 12종의 경전들을 열거하는 가운데서 ‘화엄경’은 그 지류로 보는 ‘보살영락경’과 함께 6번째로 들고, 나아가 이러한 여러 경전들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것은 오직 ‘대승기신론’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던 것을 보아 ‘대승기신론소’가 저술될 시기까지는 ‘화엄경’은 여러 대승경전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될 뿐이었고, 아직 특별한 교판상의 위치가 부여되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효는 모든 경전을 동등하게 평가하려는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한 종지의 차이를 구분하려는 의지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한 원효의 차별적인 교판관을 나타내주는 것이 그의 최후의 저술로 알려진 ‘화엄경소’에서 제시된 4교판설이다. 원효의 4교판설은 ‘화엄경’을 주석하면서 그 경전을 구경요의경으로 판석하고 여타 경전들을 차등을 두어 단계별로 위치시킨 것인데, 물론 주석하는 각각의 경전의 훌륭한 점을 지적하는 원효 특유의 기술방식을 우선 고려할 수도 있으나, ‘화엄경’의 주석에서 보여준 그 경전에 대한 판석만은 다른 경전에 대한 것과는 구분되어야 할 점이 없지 않다. 

최근 불교학계에서는 원효의 4교설의 이해를 중국 화엄종 법장의 5교설과 비교하여 차이점을 밝히려는데 집중함으로써 원효 불교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7세기 당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불교사의 변화과정, 그리고 미시적으로 원효 불교의 시기적인 변화과정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방법 결여로 원효의 화엄경관의 변화나 4교판설의 의의는 제대로 밝혀질 수 없었다. 또한 법장의 5교설과 비교하는 관점도 원효 교판설의 독자성을 강조하는데 치중함으로서 객관성이 결여된 자기중심적인 이해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4교판설의 내용을 분석하기에 앞서 우선 4교판설 성립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첫째 수·당시대 불교계의 상황, 둘째 원효의 불교사상의 변화과정에 대한 문제를 지적해 보려고 한다.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는 중국에 전래된 후 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대에 이르기까지 중관학파 계통은 삼론종과 천태종, 유식학파는 지론종과 섭론종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중관학파 계통의 삼론종과 천태종은 수대에 대성되었는데, 특히 천태종은 남북조 불교를 통합하는 사상체계를 성립시켰으며, 그에 상응하여 교판설도 이른바 남3북7이라는 다양한 교판설을 종합한 5시8교설을 성립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삼론종을 대성시킨 길장(549∼623)의 3법륜교설과 천태종을 창립한 지의(538~597)의 5시8교설에서는 ‘화엄경’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법화경’과 ‘열반경’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대에 이르러 현장에 의해 유식학 중심의 신역경전이 등장하고 자은기에 의해 법상종이 성립되어 구유식 계통의 섭론종, 그리고 지론종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불교계의 새로운 주류로 대두되었고, 반면 삼론종과 천태종은 법상종과 대립하면서 주류적인 위치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신유식학의 현장(602~664)의 3시법륜설에서는 ‘화엄경’을 거론치도 않고 ‘해심밀경’을 최상의 위치에 놓았으며, 법상종의 자은기(632~682)의 3교8종설에서는 ‘화엄경’과 ‘법화경’을 ‘해심밀경’과 동렬에 위치시키면서도 실제적으로 정소의경으로 삼은 것은 ‘해심밀경’이었다. 

그런데 곧이어 등장한 지엄(602~668)과 법장(643~712)이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공·유 대립을 회통시키면서 통합불교사상으로서의 화엄학을 성립시키고, 그 교판론으로서 5교10종설을 제창하여 ‘화엄경’을 최상의 구경요의경으로 위치시켰다. 이로써 중국불교사에서 최초로 교판의 길을 연 혜관(353~423, 또는 383~453)의 2교5시설 이래 줄곧 중요성을 인정받아오던 ‘화엄경’이 천태종과 법상종의 성립으로 한때 흔들렸던 위상을 되찾아서 마침내 최상의 구경요의경으로서의 위치를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에 신라에서 원효가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공·유 대립을 회통시키는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성립시키고, ‘화엄경’을 최상의 요의경전으로 위치시킨 4교판설을 제창한 것은 실로 중국의 불교계에서의 화엄학과 5교10종설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원효의 저술편년은 4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그의 불교사상의 성립과정도 4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은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그의 불교사상의 성립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번의 커다란 변곡점이 있었다는 점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648년 현장에 의해 번역된 신역경전과 함께 전래된 당 불교계의 파동 소식이 지적 욕구에 충만하던 30대 초반의 원효로 하여금 불교 연구의 방향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전환케 하였다. 원효는 2차나 시도한 당 유학에 실패하였으나, 그 뒤 20여년 동안 계속 전해오는 신역경전과 당 불교계 소식을 접하면서 ‘대승기신론소’ 저술을 통하여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670년 의상의 귀국을 계기로 신라에 전해진 지엄의 불교학과 화엄종 성립의 새로운 소식은 50대 중반의 원효로 하여금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수립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에 대한 확신과 함께 ‘화엄경’의 특별한 교판적 지위를 확정하는 교판관의 수립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화엄종의 교판설에 대해서는 법장에 의해 확정된 5교설만을 문제 삼고 있으나, 이 5교설은 이미 지엄의 말년경에 제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엄의 교판설의 성립과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엄은 여러 차례 다양한 교판설을 제기하고 있었는데, 27세의 저술인 ‘화엄경수현기’에서는 점교·돈교·원교의 3교판, 58세(659) 이후의 저술인 ‘오십요문답’에서는 소승·삼승·일승의 3교판, 62세(663) 이후의 저술인 ‘공목장’에서는 소승·초교(시교)·종교·돈교·원교의 5교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교판설의 성립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5교설인데, 삼승을 초교(시교)와 종교로 2분하고, 삼승초교에 현장의 신역경전인 ‘해심밀경’ ‘성유식론’ 등 유식교학을 배당하고, 종교에 ‘능가경’ ‘대승기신론’ 등 여래장 계통의 경전을 배당한 것은 현장·자은기의 법상종교학을 어디에 위치시키는가의 문제가 지엄에게는 중요한 현안으로 의식된 결과였다. 여러 교판 가운데 특히 5교설이 법장으로 계승되면서 화엄종의 5교10종의 교판설로 확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웅대한 화엄사상과 함께 5교설은 일단 지엄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엄의 문제의식은 신라에 전해져서 원효와 공감대를 이루게 되었으며, ‘화엄경’을 중심으로 하는 교판설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효가 지엄의 교학을 직접 언급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의상으로부터 지엄의 수십전법(數十錢法)을 전해 받았다는 사실뿐인데, 더 이상의 자료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원인은 원효의 화엄 관계 저술이 거의 전부 산일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원효는 ‘화엄경’에 대해서 적지 않은 저술을 하였는데, 목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화엄경소’ 10권 또는 8권, ‘화엄경종요’ 1권, ‘보법기’ 1권, ‘화엄경강목’ 1권, ‘화엄경입법계품초’ 2권, ‘대승관행’ 1권 등 6종에 달한다. 그밖에 ‘일도장’ 1권이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는 화엄 관계 저술로 기록되었으나, ‘대승기신론’ 관련 저술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원효의 화엄 관련 저술은 거의 모두 산일되었고, 오직 ‘화엄경소’의 서문과 권3(제9 광명각품)만이 현존할 뿐이다. ‘화엄경소’는 원효의 가장 중요한 저술의 하나로서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의하면 본래 8권이었는데, 권5를 나누고 ‘화엄경종요’를 합쳐 10권으로 재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일본에서는 10권본과 함께 8권본도 전승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는 원효가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찬술하다가 제4 10회향품에서 절필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어 이해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러나 중간에 절필하였다는 설화 내용이 교화승으로서의 원효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각색된 민간에서의 전승일 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절필하였다는 표현은 원효 말년의 최후 저술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4 10회향품”이라는 표현도 사실성이 결여된 부정확한 것이었다는 점은 앞 회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실제 ‘화엄경소’는 8권본으로 일단 완성되었고, 뒤에 ‘화엄경종요’와 합쳐진 10권본과 함께 2본의 ‘화엄경소’가 전승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원효의 ‘화엄경소’가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4교판설이 서술된 점이었는데, 오늘날 그 부분이 일실됨으로서 교판에 대한 원효의 설명은 직접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원효의 ‘화엄경소’는 저술 직후부터 주목을 받아 신라 불교계뿐만 아니라 당과 일본에도 널리 전해졌는데, 특히 4교판설은 당의 화엄종 승려들의 저술에 많이 인용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원효의 4교판설을 최초로 인용한 문헌은 중국 화엄종을 대성한 법장(643~712)의 ‘화엄경탐현기’(권1)이었고, 그 뒤를 이어 이통현(635~735, 또는 646~740)의 ‘신화엄경론’(권3), 혜원(673?~743?)의 ‘속화엄경약소간정기’(권1), 징관(738~839)의 ‘화엄경소’(권12) 등에도 인용되었는데, 원효의 4교판 내용으로 3승(三乘)과 1승(一乘), 별교(別敎)와 통교(通敎), 분교(分敎)와 만교(滿敎)의 구분에 대한 설명 부분까지 인용된 것은 ‘간정기’뿐이다. 

신라인의 저술로서는 8세기 중엽의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권4)에 인용되었는데, ‘간정기’의 인용 내용과 약간의 글자의 이동 이외에는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이들 문헌 가운데서 원효의 ‘화엄경소’의 찬술 시기의 추정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법장의 ‘탐현기’이다. 법장은 ‘화엄오교장’과 ‘탐현기’에서 각각 10대가의 교판설을 소개하였는데, 677~678년 경의 저술인 ‘오교장’에서는 원효의 교판설이 누락된 반면 690년대초의 저술로 추정되는 ‘탐현기’에서 비로소 인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나당 사이의 서적 교류 상황을 감안하면 원효의 ‘화엄경소’ 저술 시기는 대략 670년대말 680년대초, 즉 원효의 말년인 60대로 추정된다. 

원효의 ‘화엄경소’, 특히 4교판설은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 수립과정에서 ‘대승기신론소’의 일심사상에 이은 두 번째 최후의 결론으로서의 의의를 가진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41호 / 2022년 7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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