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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긍정의 힘-김명기

기자명 동명 스님

주어진 환경에 만족 ‘긍정의 힘’

묵묵히 자신의 길 가는 식물
우리는 세상·남 비판에 이용
비교 없이 살면 불만도 없어
함께 잘사는 것이 행복의 길

바닷가 작은 마을 깨진 담벼락 아래
아무렇게나 쌓인 돌무더기 속
갓 자란 상추 한 포기 보며 반성한다
상추만 한 혓바닥으로 틈만 나면
힘들어 죽겠다고 말한 것과
고개 숙이면 지는 것이라고
주눅들지 않기 위해 쏟아낸
일그러진 말들에 대해
순응을 거부하는 것이 돌무더기 같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상처입지 않기 위해 조합해낸
은유와 비유의 모든 문장들에 대해 반성한다
사는 것에 손사래를 치듯 척박이란 말을 앞세워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부정했나
옅은 바람에도 일렁이며 낮은 곳으로만
푸르게 펼쳐지는 생, 끝내 저렇게 살아내는
상추 같은 이들과 이제 막 상추 씨앗으로
세상에 뿌려지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과 글들
바람이 비벼댄 자리마다 손금처럼 번져가는
잎맥과 잎맥 사이 가늠할 수 없는 넓이를 들여다보며
척박이란 말을 새삼 배운다
낮은 곳에서 흔들리고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
굳건한 저 긍정의 힘

(김명기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전당, 2009) 

바위틈에 아주 조금 있는 흙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나 소나무는 그 척박한 곳에서도 평생 불평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비가 올 때마다 뿌리내릴 흙이 조금씩 없어지는 계곡에 뿌리를 내린 귀룽나무도 아무 불평 없이 5월이 되면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어떤 조건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식물들을 배우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식물들의 속성을 비유하여 세상이나 남을 비판하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식물국회’ ‘식물정당’ 등 정치를 비판할 때 쓰고, 병으로 몸이 마비된 사람을 ‘식물인간’이라 부르기도 한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는 식물들은 어떤 마음일까? 깨진 담벼락 아래 아무렇게나 쌓인 돌무더기 속에서 싹을 틔운 상추 한 포기는, 이를테면 108개의 계단을 올라야 갈 수 있는 달동네에 판잣집을 짓고 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나 상추는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상추가 바로 옆에 자리한 넓은 밭에 안착하지 못하고 돌무더기에 뿌리내렸으면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알맞은 곳에 살면서 공덕을 쌓고, 스스로 바른 서원 세워 산다면, 그것이 최상의 행복이어라”(‘마하망갈라 숫따’)라고 말씀하셨다. 알맞은 곳이란 출가자에게는 수행하기에 적당한 장소이고, 재가자에게는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교육시키기에 적절한 장소이다.

달동네의 판잣집에 사는 사람은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 같은 말은 하지 않을지 모른다. 얼마 전 시인 서정춘 선생과 통화했는데, 선생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쾌적한 방에 수도꼭지만 돌리면 뜨신 물 나오는 곳에 살고 있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느냐는 말씀이셨다. 서 선생은 젊은 시절 상경하자마자 청계천 판잣집에서 사셨는데, 그때도 불만이 없었다고 하신다. 

시인의 말마따나 세상에는 “옅은 바람에도 일렁이며 낮은 곳으로만/ 푸르게 펼쳐지는 생”이 있어서, “끝내 저렇게 살아내는/ 상추 같은 이들”과, “이제 막 상추 씨앗으로/ 세상에 뿌려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생각하며 시인은 “낮은 곳에서 흔들리고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 굳건한 저 긍정의 힘”을 배운다.

주위를 둘러보니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린 식물들이 참으로 많다. 척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다. 그들은 가급적 비교하지 않고 살겠지만,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나 권력 있는 지도층 인사들은 오히려 비교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함께 잘살지 않으면 지속적인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644호 / 2022년 8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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