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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37)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20)

원효불교는 중국 화엄종 교학 토대 마련한 당 법장에 큰 영향

원효의 화엄사상은 화엄종 중심 종파 창립한 화엄교학과 구분
법장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인용하여 대승기신론의기 저술 
탐현기에 4교판 실린 것 보면 화엄경소는 원효 말년 작품 확실

법장 스님의 ‘화엄경탐현기’ 중 원효 스님의 4교판 수록부분. [동국대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법장 스님의 ‘화엄경탐현기’ 중 원효 스님의 4교판 수록부분. [동국대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지금까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원효불교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밝혀오는 과정에서 원효는 먼저 650년 현장의 신유식학을 접하게 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공·유 대립의 극복문제를 핵심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어 670년 의상의 귀국을 계기로 당의 화엄학을 새로 접하게 되면서 중관학과 유식학을 통합한 종합적인 불교사상의 토대 위에서 ‘화엄경’의 교설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는 단계로 진입하였는데, 구체적인 성과가 4교판이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원효불교의 핵심적인 주제와 사상체계는 신라 불교계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의의를 가진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원효가 활약하던 7세기는 당의 불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전체 불교계에서도 원효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해결책이 모색되고 있었기 때문에 원효 불교는 국제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원효의 불교는 동아시아 불교사의 중심무대인 당 불교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상호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이 성립되는 것과 같은 시기에 당 불교계에서도 중관학과 유식학을 통합한 사상체계로 성립된 것이 화엄교학이었다. 원효의 화엄사상과 4교판설의 성립에는 의상에 의해 전래된 지엄(智儼)의 화엄학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나, 원효의 4교판설은 다시 당 불교계에 전해져 화엄교학을 집대성한 법장(法藏)을 비롯해서 그 이후의 화엄학승들에게 주목받아 그들의 저술들에 인용되고 있었다. 원효의 교판론을 인용한 최초의 문헌은 법장의 ‘화엄경탐현기’였으며, 이어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에서는 ‘탐현기’에서의 인용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그런데 혜원(慧苑)의 ‘속화엄약소간정기’에서는 원효의 4교판설 가운데 앞의 법장과 이통현이 생략하였던 3승과 1승, 별교와 통교, 분교와 만교의 구분에 대한 설명 부분까지 인용하였고, 징관(澄觀)의 ‘화엄경소’는 그 ‘간정기’의 인용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는데, 신라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에서의 인용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은 앞 회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런데 원효의 4교판설을 인용한 당의 화엄학승들은 각자 독자의 교판설을 제시하면서 원효의 4교판에 대해서도 평가를 다르게 하였다. 그것은 불교계 상황과 화엄교학 내용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인데, 당의 화엄교학, 특히 교판론의 변화과정과 원효의 교판론에 대한 평가의 차이점을 검토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당의 화엄학승들의 원효의 4교판에 대한 평가내용을 검토하기에 앞서 ‘화엄사상’과 ‘화엄교학’ 사이의 개념의 차이를 지적하여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원효는 ‘화엄경’을 구경 요의경으로 하는 4교판론과 불교사상체계를 확립하였으나, 끝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불교종파를 창립하거나 특정 종파에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 종파의 교학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당의 화엄학승들은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특정 종파를 창립하고 계승하였기 때문에 ‘화엄경’도 그 종파의 교학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원효의 불교사상체계는 ‘화엄사상’, 당 화엄학승들의 불교사상체계는 ‘화엄교학’이라는 개념으로 일단 구분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당 화엄종에서의 교판설이 시기에 따라 변화되어 가운데 제일 먼저 주목되는 인물은 지엄(602~668)이었다. 지엄은 화엄교학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는데, 교판론에서는 비교적 유연하여 다양한 설을 제기하여 동교(同敎)·별교(別敎)의 2교판, 점교(漸敎)·돈교(頓敎)·원교(圓敎)나 1승(一乘)·3승(三乘)·소승(小乘)의 3교판, 소승(小乘)·초교(初敎)·숙교(熟敎)·돈교(頓敎)·원교(圓敎)의 5교판 등을 병용하였다. 특히 5교판은 지엄의 만년(663년 이후)의 저술인 ‘화엄공목장’에서 사용된 것인데, 제자인 법장(643~712)에 계승되어 소(小)·시(始)·종(終)·돈(頓)·원(圓)의 화엄종의 대표적인 5교판으로 정립되었다. 

지엄은 현장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현장의 신역불교를 종래의 구역불교체계 가운데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를 검토한 결과 종래의 3승교를 초교와 숙교로 구분하여 초교에 신유식학의 경전(유가론·현양론·잡집론·무성섭론·유식론·불지론 등), 숙교에 구역경전(열반경·대지도론 등)을 배당하였다. 그리고 그 상위에 1승교의 실천에 이르는 방편으로서 언어를 초월한 경지의 돈교를 위치시키고, ‘화엄경’을 구경의 1승원교에 배당함으로써 화엄종 창립의 교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지엄의 5교판론은 670년 의상에 의해 신라에 전래되어 천태종의 화법4교와 함께 원효의 4교판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원효의 4교판론을 수록한 ‘화엄경소’가 산일됨으로서 원효 자신의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없어 매우 아쉽다.

다음 지엄의 화엄교학을 계승 발전시켜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는 법장(643~712)은 지엄의 5교판을 계승 정비하고, 그 위에 신유식학의 법상종, 특히 자은기(慈恩基, 窺基는 잘못된 칭호)의 8종교판을 채용하여 5교10종의 교판을 확립하였다. 현장의 신유식학에 대하여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지엄과 달리 법장은 적극적으로 화엄교학의 체계 가운데 수용한 결과였다. 그런데 법장도 35~36세(677~678) 때의 저술인 ‘화엄오교장’에서의 성상융회(性相融會)의 주장이 49세(690) 이후의 저술인 ‘화엄탐현기’에서의 성상결판(性相決判)의 주장으로 바뀐 것을 보아 신유식학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에서 분리하는 방향으로 입장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법상종 교단의 쇠퇴와 화엄종 교단의 흥기라는 불교계의 변화에 상응하는 것으로 본다. 법장의 5교는 소승교·대승시교(상시교·공시교)·종교·돈교·원교이며, 10종은 6종의 부파불교와 4종의 대승불교로 구성되었는데, ‘화엄경’의 교설은 5교 가운데 원교(圓敎), 10종 가운데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 최상에 위치시켰음은 물론이다. 이 교판에 의하여 종래 여러 학파 불교학의 연구성과, 특히 구역불교를 집대성한 천태종의 교판과 신역불교인 법상종의 교판을 통합하면서 ‘화엄경’을 정점으로 하는 모든 경론의 체계적 위치를 자리잡게 하고, 그에 근거하여 자신의 화엄교학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법장은 5교10종의 교판 이외에 따로 수상법집종(隨相法執宗)·진공무상종(眞空無相宗)·유식법상종(唯識法相宗)·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 등 4종의 교판을 내어 여래장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과 유식학의 통합을 추진하였는데, 원효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효의 저서 가운데 법장의 교학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대승기신론소’였다. 이 책은 당 불교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서 ‘해동소(海東疏)’로 불렸는데, 특히 법장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들여 부분적으로는 그대로 인용하여 ‘대승기신론의기’를 저술하였다. 

그밖에도 법장의 ‘오교장’의 단혹의(斷惑義)에는 원효의 ‘이장의’ 같은 ‘오교장’의 공유교철(空有交撤)의 사상에는 원효의 ‘십문화쟁론’의 공유회통(空有會通)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원효의 4교판론이 수록된 ‘화엄경소’는 ‘오교장’이 아닌 ‘탐현기’에서 비로소 인용되었음이 주목된다. ‘오교장’과 ‘탐현기’에서는 각각 10대가의 교판론을 소개하였는데, ‘탐현기’에서만 7번째로 원효의 4교판을 들었다. ‘오교장’이 저술되던 677~678년 당시에는 원효의 ‘화엄경소’가 아직 저술되지 않았거나 당에 전해지지 않았고, ‘탐현기’가 저술되는 690년, 즉 원효의 사후 5년이 지나서 비로소 법장에게 전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화엄경소’가 원효 말년경의 저술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당의 화엄종에 미친 원효의 영향은 법장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통현(635~730)은 법장과 생존 시기를 거의 같이하면서도 인품과 생활, 그리고 사상 등의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화엄경’ 자체를 입법계품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체계로 보고, 깨달음의 지혜를 현실화시키는 선정(禪定)의 실천을 강조함으로서 뒷날 선종에서 특히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고려의 지눌이 이통현의 화엄사상을 중시하여 그의 ‘신화엄경론’ 40권을 절요하여 유통시킨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통현은 ‘신화엄경론’에서 원효의 4교판을 인용하면서 색다른 10종교판을 제시하였는데, 그 기본적인 구조는 원효의 4교와 법장의 5교10종의 교판체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음 혜원(673~743)은 법장의 상수제자였으나 뒷날 징관에 의하여 비판받은 이후 화엄종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되었던 인물이다. 혜원의 ‘간정기’의 내용 가운데는 보기에 따라서는 사설(邪說)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견해가 없지 않으나, 전체적인 내용은 오히려 징관보다 법장의 입장을 정통적으로 이어받은 면이 있다. 그의 새로운 학설로서 특히 비판받은 것은 4교판(迷眞異執敎·眞一分半敎·眞一分滿敎·眞具分滿敎)이었다. 그런데 이 교판설은 ‘보성론’을 전거로 하여 여래장(진여)의 근원성을 확신하고, 여래장연기의 바탕 위에서 법계연기를 이해하려는 주장으로서 지엄-법장이 여래장연기설에서 독립시킨 법계연기설을 다시 여래장연기설로 환원시킨 것으로 평가되는데, 특히 원효의 여래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점이 주목된다. 혜원은 원효의 4교판을 중시하여 법장이나 이통현보다 좀 더 자세하게 인용하면서 부분적으로 비판하였다. 즉 소승교를 삼승별교, 반야를 삼승통교라고 한 판석의 문제를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혜관(368~438?)에게서 비롯한 것으로 원효의 독창설이 아니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 다음 징관(738~839)은 수학과정에서부터 제종융합(諸宗融合)의 입장이었는데, 특히 법상종과의 결별(性相決判), 화엄과 천태의 조화, 선교의 통합 등의 입장에서의 화엄사상 전개가 돋보인다. 징관 당시 법상종의 쇠퇴, 천태종의 부흥, 선종의 대두라는 불교계의 변화에 대응하는 화엄종 입장에서의 사상 정립의 결과였다. 징관의 교판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엄종의 5교는 천태종의 화법4교에 돈교를 더한 것이었고, 원효의 4교는 천태종의 화법4교에서 별교와 원교를 합하고 일승분교를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여 천태의 화법4교·화엄의 5교·원효의 4교의 같은 점을 강조한 점이었다, 

그리고 사상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실천불교인 선종을 화엄의 5교에 편입한 점인데, 징관은 선종 가운데도 특히 하택선(荷澤禪)을 중심으로 선사상을 이해하고, 화엄의 5교 가운데 네 번째인 돈교(頓敎)에 위치시키는 차등적인 선교통합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징관의 화엄종을 계승한 종밀(780~841)은 화엄종과 선종(洪州宗)의 대등한 통합을 추진하면서 교종과 선종의 교판을 새로이 제기하였다. 선종 대두 이후의 징관과 종밀의 교판론은 원효의 것과는 구분되는 다음 단계의 것으로서 한국불교사에서 그 대응되는 인물을 찾는다면 징관에게는 의천, 종밀에게는 지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45호 / 2022년 8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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