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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고대불교-삼국통일과 불교(38)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21)

인도로부터 이어진 역사적 공·유 논쟁 마침내 원효에 의해 해소

인도의 공·유 논쟁은 해소되지 못하고 금강승 성립 등 밀교 전환
원효는 동아시아로 옮겨온 공·유 문제 대승기신론으로 회통시켜
구체적 성과로 원효의 4교판, 당 법장의 5교10종과 4교 제시돼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대당서역기 권1. [교토국립박물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대당서역기 권1. [교토국립박물관]

원효는 동아시아문화권의 중심인 당에서 유학한 적이 없고, 신라에서만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불교사상은 7세기 당을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계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한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원효는 2차에 걸쳐 현장의 신역불교를 접하기 위하여 당 유학을 시도한 바 있었으나, 1차는 타의(他意)에 의해, 2차는 자의(自意)로 유학을 단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았으나, 당의 불교계 동향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고, 새로 전해오는 경론들을 누구보다 먼저 탐독하여 깊은 이해를 추구하였다. 특히 구역경전을 이해한 토대 위에서 신역경전인 ‘유가사지론’의 정확한 해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래장사상 계통의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체계에 의거하여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공·유 대립 문제를 해결한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이에 그치지 않고 말년에는 ‘화엄경’을 주석하면서 4교판론을 통하여 전불교를 통합하는 이해체계를 수립하는 단계로 귀결시켰다. 그런데 공·유 대립의 극복과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수립은 당 불교계에서도 동시에 추진되어 화엄교학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법장에 의해 집대성된 화엄교학은 동아시아불교가 도달한 최고 최후의 형이상학적 사유체계로 평가되는데, 그 성립과정에서 원효의 불교사상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원효의 불교사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동아시아불교사의 맥락에서 추구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는 워낙 커다란 문제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공·유 대립과 통합과정의 문제에 국한하여 원효 불교가 동아시아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밝히려고 한다. 

 원효는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신역경론을 접한 이후에 최초의 저술인 ‘대승기신론별기’의 대의(大意)를 서술한 서문에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대립 문제를 간명하게 정리하였다. “(유식학파에서는) 이론이 세우지 않는 것이 없으며, (중관학파에서는) 깨뜨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중관론’과 ‘십이문론’ 같은 것들은 모든 집착을 두루 깨뜨리며 또한 깨뜨린 것도 깨뜨리되, 깨뜨리는 것(能破)과 깨뜨림을 당한 것(所破)을 다시 인정하지 않으니, 이것은 보내기만 하고 두루 미치지 않는 이론이라고 말한다. 또 ‘유가론’과 ‘섭대승론’ 같은 것들은 깊고 얕은 이론들을 온통 다 세워서 법문을 판결하였으되, 스스로 세운 법을 모두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주기만 하고 빼앗지는 않는 이론이라고 말한다.” 원효는 중관·유식의 대립 문제를 당시 불교계의 현안으로 인식한 데 이어 ‘대승기신론’으로 두 학파의 대립을 해결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이제 이 ‘기신론’은 지혜롭기도 하고 어질기도 하며, 깊기도 하고 넓기도 하여 세우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깨뜨리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도리어 긍정하고 있다. 도리어 긍정하는 것은 저 가는 자가 가는 것이 다하여 두루 세움을 나타내며,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주는 자가 주는 것을 다하여 빼앗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것은 모든 경론의 조종이며, 모든 쟁론을 평정시키는 주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원효가 ‘대승기신론’을 주석하면서 제일 앞에 내세웠던 중관·유식의 대립 문제는 당시 당의 불교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된 것이었다. 7세기 중반 현장의 신역은 중국 불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는데, 구유식과 신유식의 갈등, 삼승과 일승의 차이, 불성의 유무, 중관과 유식의 대립 등의 논란이었다. 우선 현장의 번역팀 가운데서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증의의 필두로서 번역팀의 일원이었던 영윤(靈潤)이 무불성(無佛性) 문제를 비롯한 14개의 의문을 제기하며 현장의 신역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현장 문하의 반격으로 찬반 논란은 확대되었는데, 이러한 논쟁에 참여한 원측을 비롯한 신라 출신의 학승들에 의해서 이러한 파문 소식은 신라에도 빠르게 전해져 옴으로서 신라 불교계에서도 당과 거의 같은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구역불교의 이해기반을 구축한 토대 위에서 신역불교를 새로 접한 원효는 누구보다 먼저 그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7세기 당 불교계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 가운데도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중관학과 유식학의 공·유 대립이었는데, 인도불교에서부터 유래한 근본적인 사상 문제이자 역사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도의 대승불교는 용수와 데바를 시조로 하여 ‘반야경’의 공사상을 조술한 중관학파, 그리고 무착과 세친에 의해 ‘해심밀경’과 ‘대승아비달마경’의 사상을 중심으로 조직한 유식학파가 양대 주류를 이루었다. 5세기초부터는 중국에 전래되기 시작하여 중관학파는 삼론종과 천태종, 유식학파는 섭론종과 지론종을 성립시켰다. 그런데 인도 불교계에서는 6세기 중반 중관학파 청변(淸辯,490~570)과 유식학파 호법(護法,530~561)이 동시에 출현하여 격렬한 논쟁을 전개함으로서 중국에는 “호법·청변의 공유논쟁”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대면하여 논쟁한 사실은 없고 저술을 통하여 상대 주장을 논박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호법의 제자인 계현(戒賢)에게 직접 유식학을 배워온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두 사람의 대립 사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고, 또한 청변의 ‘대승장진론(大乘掌珍論)’ 2권과 호법의 ‘대승광백론석(大乘廣百論釋)’ 10권을 650년에 연이어 한역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공·유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졌다. 또한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중관학파의 사자광(獅子光)이 ‘중론’과 ‘백론’을 강의하면서 ‘유가사지론’을 비판하였는데, 그 강의를 들은 현장이 그 강의 내용을 비판하는 ‘회종론(會宗論)’ 3권을 저술하여 계현과 대중들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된 것을 보아 현장 자신이 직접 인도 불교계에서의 두 학파 사이의 논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식학 경전 번역을 마무리하는 ‘성유식론’의 편역에 이어 최후로 ‘대반야경’ 600권을 번역하였다. 공·유논쟁에 대한 현장의 관심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어져서 자은기의 제자인 혜소(慧炤)는 ‘성유식론요의등’에서 호법이 ‘대승광백론석’, 청변이 ‘대승장진론’을 지어 공·유를 쟁론했다는 사실을 특기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원효의 저술 가운데서도 ‘대승장진론종요(大乘掌珍論宗要)’ 1권과 ‘대승장진론요간(大乘掌珍論料簡)’ 1권, 그리고 ‘대승광백론종요(大乘廣百論宗要)’ 1권과 ‘대승광백론지귀(大乘廣百論旨歸)’ 1권 등이 있었던 것을 보아 청변과 호법의 저술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 저술들을 주석하여 공·유논쟁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를 밝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저술들이 모두 일실되어 확인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뿐만 아니라 중관학이나 유식학에 관한 원효의 여타 저술들도 거의 전부 일실되어 공·유 통합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성립시키는 과정과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 점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신라 출신 승려로 원효에 앞서 공·유대립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결을 모색한 사람은 원측(圓測)이었다. 그는 일찍이 당에 가서 구유식 계통인 섭론종의 법상과 승변에게 수학하고, 현장이 귀국하자 그에게 사사한 다음에 ‘반야심경찬(般若心經贊)’ 1권을 저술하였는데, 호법의 제자로서 ‘불지경론(佛地經論)’ 7권(649년 한역)을 저술한 친광(親光)의 말을 인용하여 청변과 호법 사이의 공·유 대립을 서술하면서 화회를 시도하였다. “일천년 전에는 불법이 한 맛이었으나, 천년이 지난 뒤에 공과 유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고 천년 뒤 남인도 건지국(健至國, Kāňcipura)에 두 보살이 일시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 한 사람은 청변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호법이었다. 유정(有情)이 불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도록 공종(空宗)과 유종(有宗)을 세웠으니, 모두 부처님의 뜻을 이룬 것이다. 청변은 공을 잡고 유를 덜어냈는데, 이는 유라는 집착을 없애고자 한 것이요, 호법은 유를 세우고 공을 덜어냈는데, 이는 유라는 집착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은 유, 곧 공이라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유는 공, 곧 색이라는 교설에 어긋나지 않는다. 공이면서 유인 것은 이제(二諦,眞俗)를 이루고 공도 아니요, 유도 아닌 것은 중도에 계합한다. 불법의 대종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 신유식 입장에서 구유식을 화회시키려던 절충파다운 주장이다.

 한편 화엄교학을 집대성한 법장은 중관학파의 ‘십이문론’을 해석한 ‘십이문종치의기(十二門宗致義記)’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영향을 받아 저술한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등 두 저술에서 현장 이후 일조삼장(日照三藏,地婆訶羅, 613~687)이 전한 말로서 호법을 계승한 계현(戒賢)과 청변을 계승한 지광(智光) 등이 각각 자신 학파의 교설이 상대의 것보다 수승하다는 것으로 교판하였던 사실을 전하였다. “근대에 천축의 나란타사에는 동시에 2대 논사가 있어 설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은 계현이라고 하는데, 멀리 미륵과 무착을 계승하고, 가깝게는 호법과 난타를 계승하여 ‘해심밀경’ 등의 경과 ‘유가사지론’ 등의 논에 의해 법상대승을 밝히고 널리 명수를 나누어 삼시교를 판별하였다. (중략) 다른 한 사람은 지광이라고 하는데, 멀리 문수와 용수를 계승하고 가깝게는 청목과 청변의 가르침을 받아 ‘반야경’ 등의 경과 ‘중론’ 등의 논에 의해 무상대승을 드러내고 널리 진공을 변별하여 삼시교를 가지고 종파를 열었다.(하략)” 계현의 삼시교판에서는 상대의 무상대승이 방편설에 지나지 않고, 반대로 지광의 삼시교판에서는 역시 법상대승이 방편설에 지나지 않다고 하여 각각 자신의 학파에서 소의로 하는 ‘해심밀경’과 ‘반야경’이 요의경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에서 청변과 호법으로부터 시작된 공·유 논쟁이 그들의 제자인 계현과 지광으로 계승되어 교판논쟁으로 전개되면서 각각 소의로 하는 경전의 우열을 다투게 되었다.

인도불교사에서는 7세기 이후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공·유대립을 회통시킬 수 있는 사상을 계발하지 못한 채 금강승(金剛乘)의 성립으로 밀교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곧 쇠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 문제의 해결 과제는 동아시아 불교계로 넘겨오게 되었다.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이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인도불교의 아류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동아시아불교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도의 중관학파는 중국에 전래되어 삼론종, 그리고 그에게서 발전한 천태종으로, 또한 유식학파는 역시 중국에 전래되어 지론종과 섭론종으로 계승되었는데, 645년 이후 현장에 의해서 호법 계통의 유식학 경론의 번역과 함께 청변과 호법 사이의 공·유 대립의 역사적인 사실이 전해지고, 이어 678년 일조삼장에 의해서 계현과 지광 사이의 교판 논쟁 사실이 다시 소개되면서 이 대립의 극복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공·유 대립을 극복한 퉁합불교의 사상체계로서 당 불교계에서는 법장의 화엄교학, 신라 불교계에서는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을 성립시켰으며, 그 구체적인 성과로서 법장의 5교10종과 4종, 원효의 4교판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47호 / 2022년 9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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