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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39)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22)

원효의 위대한 학승 면모 가려진 것은 불교쇠퇴 과정서 노정된 모순

세계적 불교난제 해결한 뛰어난 업적에도 교화승 모습만 남아
오늘날 확인되는 원효 저술 대부분은 일본자료 있었기에 가능  
일본 전해지는 화엄법통 통해 법장과 원효 중심 학통의식 확인 

‘화엄연기회권-원효회’ 부분, 카마쿠라 시대, 종이에 색, 31.7×1,414.5cm, 일본 교토 고잔지. 이 부분에는 원효가 여러 승려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원효를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효 불교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행적과 불교사상의 전모는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첫째로 한국 불교학 수준이 아직 초보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더욱 직접적인 이유는 원효의 불교 내용 자체가 사상적·사회적으로 수준과 폭이 워낙 높고 넓으며, 한국 불교계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불교계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광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 산일되어 접할 수 있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원효 자료의 대부분이 산일된 이유는 한국불교사에서 원효 불교가 11세기경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서 한번 재인식된 이후에는 시대가 내려오면서 교학불교가 쇠퇴하고 선불교가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800여 년간 학승으로서의 사상적 업적은 잊혀지고, 교화승·신이승(神異僧)으로서의 설화적인 내용만이 단편적으로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원효 불교가 재평가되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로서 겨우 100여년에 불과하고, 그것도 정치적인 상황과 불교계의 동향에 따라 적지 않은 굴곡을 겪어오는 과정에서 자료 정리와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효 불교에 대한 연구 조건이 이와 같이 척박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까지 21회의 연재를 통해서 원효의 두 얼굴 가운데 하나인 교화승으로서 출가와 재가를 넘나드는 무애한 교화 활동을 통하여 불교의 사회적 기반을 크게 넓힘으로서 국가발전과 사회통합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다른 얼굴인 학승으로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마련함으로서 신라 불교계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불교계의 사상사적 과제를 해결하여 인도불교의 아류에서 벗어나는 불교사상체계 수립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밝혀 보려고 하였다. 이제 원효 불교에 대한 서술을 끝내면서 마지막의 결론으로 원효 불교의 전승과정과 평가의 문제를 지적해 보기로 하겠다.

원효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지역인 당에 유학한 적이 없고, 신라 고국에서만 일생을 보낸 인물이었지만, 그의 불교사상은 7세기 당을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계의 사상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불교사에서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불교사에도 일찍부터 전해져서 주목받았으며, 다양한 존숭의 칭호로 불려졌다. 그리고 그의 저술들은 다수 인용되고 연구되었으며, 필사되고 간행되면서 전승되었다. 

먼저 중국불교사에서는 원효 행적의 자료가 ‘송고승전’의 원효전과 의상전의 내용을 참조하거나 의용하면서 전승되었고, 원효의 행적 가운데서도 특히 당 유학길에서의 깨달음의 설화와 ‘금강삼매경론’ 저술의 연기설화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원효의 저술은 화엄종의 법장·이통현·혜원·징관 등에 인용되면서 중국 화엄교학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는데, 원효의 많은 저술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시된 것은 ‘화엄경소’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이었다. 또한 원효에 대한 호칭은 ‘원효법사’ ‘효공’ ‘대사’ 등으로 불린 것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주로 학승으로 인식되었다. 다음 일본불교사에서는 역시 ‘송고승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원효의 행적과 불교사상을 이해하였는데, 특히 화엄종의 묘에(明惠,1173~1232)가 ‘송고승전’의 원효전과 의상전에 의거하여 깨달음과 ‘금강삼매경론’ 찬술의 연기에 관한 글을 짓고 제자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화엄조사회전’을 편찬함으로서 원효는 의상과 함께 화엄종의 조사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불교사에 원효에 대한 호칭은 ‘화엄종조사’ 외에도 ‘대사’ ‘법사’ ‘황룡대사’ ‘구룡(丘龍)’ ‘효공’ ‘분황의 진나(陳那)’ 등 다양하게 불려졌음을 보아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도 진나의 후신으로 인식된 것은 일본 불교학계에서 원효의 유식학과 인명학 분야의 학승으로도 크게 평가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에 원효의 저술이 전래된 것은 묘에의 시기보다 훨씬 앞선 나라시대(710~784)부터이며, 이후 에도시대(1603~1867)까지 계속 전래되어 오늘날 확인되는 원효 저술의 대부분이 일본불교사에서의 전승을 통하여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의 저술 80여부 150여권(또는 100여부 200여권) 가운데 오늘날 전해지는 저술(서문이나 잔권으로 일부만 전해지는 것 포함) 22부 가운데 ‘동문선’에 수록된 6부의 서문, 그리고 ‘발심수행장’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단편) ‘화엄경소(서문과 권3)’ ‘미타증성게’(단편) 등 5부 이외의 저술은 모두 일본불교사에서 전승되어온 것들로서 근대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과 만자속장경에 수록돼 오늘날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원효의 행적과 불교사상에 대하여 이 정도의 이해나마 가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불교사에서 전승해준 자료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한국불교사에 전해진 원효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부 민간에서 전승되는 설화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 “원효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크나큰 업적은 ‘당전(송고승전)’과 행장에 자세히 설해져 있어서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고,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 특이한 사적만을 쓴다”라고 서술한 바와 같이 깨달음의 체험과 저술 업적 등 학승으로서의 면모 대신에 결혼으로 실계하고 환속한 거사의 행색으로 거리낌 없는 행동을 보인 교화승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의천의 ‘대각국사문집’에서는 뛰어난 학승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으며, ‘삼국사기’ 이래의 많은 유학자들의 자료에는 특히 거사로서의 면모, 임진왜란 이후 사적기에는 수많은 사찰의 창건자로 기록되어 있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결과 원효에 대한 칭호도 다양하여 ‘서당화상’ ‘신승(神僧)’ ‘보살’ ‘성사(聖師)’ ‘(동방)성인’ ‘화쟁국사’ ‘대사’ ‘효공’ ‘(소성)거사’ 등의 존칭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원효의 저술은 12세기 이후부터 잊히기 시작하여 20세기에 와서는 4-5종을 제외한 대부분을 일본불교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효 불교의 전승과정에서 교화승으로서의 원효와 학승으로서의 원효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것은 선종 위주로의 불교계의 개편과 전반적인 불교의 쇠퇴과정에서 노정된 모순의 결과였다.

원효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고선사서당화상비’이다. 이 비석은 9세기 초엽(800~808)에 원효의 손자 설중업이 원효의 업적을 추모하여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김언승(헌덕왕)의 후원을 받아 세운 것인데, 오늘날 단편으로 남아 내용의 일부만을 접할 수 있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그 일부의 내용만으로도 원효의 학자로서의 저술 업적, 거사로서의 교화 활동, 신승으로서의 초인적 행적 등 다양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학승으로서는 공(空)에 관한 사상적 논쟁을 해결하는 저술로서 ‘십문화쟁론’과 ‘화엄종요’를 특기하고 있으며, 교화승으로서는 원효를 거사의 모습으로 조성하여 기리고 있으며, 신승(神僧)으로서는 고선사에서 강의하는 도중에 물을 품어 당나라 성선사(聖善寺)의 화재를 진압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신승으로서의 이미지는 원효가 입적한 이후 100년 경에는 성립되어 이후 상당히 널리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890년에 수립된 ‘월광사원랑선사비문’에서 충남 직산을 원효 성도지로 서술하면서 원효를 ‘신승’으로 호칭하였던 것이 그러한 예이다. 

한편 이 비문에서는 779년 설중업이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일본 황족의 일원이자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오오미 미후네(淡海三船)의 환대를 받은 사실을 특기하였는데, 오오미 미후네는 일찍이 출가하였다가 환속하여 불교 관계 저술도 많이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대승기신론’을 주석한 것으로도 전하는데, 특히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명을 받아 설중업에게 시를 지어주는 등 반기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삼국사기’ 설총전에서도 전해주고 있다. 이로써 원효의 저술은 8세기말 9세기초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신라 본국에도 전해져 원효를 재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8세기 중엽 이후 신라 불교계에서는 의상의 화엄종이 중앙 불교계에 진출하면서 주류적인 종파로 등장하게 되었다. 의상 계통의 화엄종에서는 ‘화엄경’ 지상주의 풍조가 대두하면서 그 법손들에 의해 의상의 ‘일승법계도기’에 대한 강의와 주석에 집중하게 되었다. 의상의 법손들에 의한 주석은 10세기 중반 균여에게까지 이어져서 ‘일승법계도원통기’를 저술하였고, 그 뒤에는 ‘일승법계도기’에 대한 의상 법손들의 주석을 집대성한 ‘법계도총수록’이 편찬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번쇄한 자구 주석 위주의 연구는 의상의 법손들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고, 불교계 전체로 확대되어 당시 불교학의 전반적인 연구풍토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원효의 저술에 대한 이해도 태현과 견등 등의 저술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승기신론’ 같은 경론 자체보다도 원효나 법장 등 학자들의 주석을 연구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에 전해져온 저자 불명의 ‘화엄종소립오교십종대의약초(華嚴宗所立五敎十宗大意略抄’ 1권(대정장 72,200중)에는 다음과 같은 화엄종 조사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보현보살·문수보살·마명보살·용수보살·견혜보살·각현보살·일소보살·두순보살·지엄보살·법장보살·원효보살·대현보살·표원보살·견등보살·양변보살·실충보살·세불희보살·총도보살·도웅보살.” 이 법계는 인도·중국·신라, 그리고 일본의 화엄의 법통의 흐름을 나타내주는 것인데, 역사적으로 실제 이러한 법계가 성립되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법계를 통하여 유추할 수 있는 것은 8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서는 의상의 화엄종 법손들과 구별되는 다수의 학승들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화엄경’과 함께 ‘대승기신론’의 연구를 중시하는 학승들 가운데 법장과 원효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일종의 학통 의식이 성립되었고, 이들의 저술이 일본에 전승되면서 앞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법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초기의 불교교단은 교종과 선종의 2원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화엄종과 법안종이 각기 교종과 선종의 대표적인 종파로 대두되었다. 이때 화엄종의 균여(923~973)가 지엄·법장·의상 등의 화엄학 관계 저술을 주석하였는데, ‘열반종요’ ‘십문화쟁론’ ‘화엄종요’ ‘이장의’ ‘보법기’ ‘일도장’ ‘대승기신론소’ ‘금광명경소’ 등 많은 원효의 저술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의상의 화엄종의 입장과 주석 위주의 해석으로서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978년에 수립된 ‘보원사법인국사비’에서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을 병칭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두 사람을 함께 묶어서 추앙하는 불교계의 분위기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49호 / 2022년 9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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