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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관 겸수, ‘멍’과 함께 ‘명’(明)을 찾자

고요히 그친 가운데 활발한 사유 이뤄져야

혼탁한 물은 ‘있는 그대로’ 못 비춰…그쳐야 밝은 거울로 역할
지향점 없으면 괴여 있는 물 불과…지관은 지혜의 능동성 강조
신경과학 분야 ‘이완된 각성’ ‘평온한 각성’은 지관겸수 의미해

지관의 지혜(觀)는 ‘고요한 마음에 비춰진’ 것일뿐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적극적 활동이다.[한국불교문화사업단]
지관의 지혜(觀)는 ‘고요한 마음에 비춰진’ 것일뿐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적극적 활동이다.[한국불교문화사업단]

멍때리기는 ‘멍’이라는 표현이 그러하듯 일반적으로 머리·생각·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마치 쓰레기통을 비우듯 잡다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비워내고 깨끗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릿속은 쓰레기통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이 쓰레기만으로 꽉차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법륜 스님의 다음 말씀은 ‘비움’의 진정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간디는 번뇌가 많고 일이 안되면 지하에 내려가서 혼자 조용히 단식을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일주일이나 열흘동안 단식을 합니다. 이렇게 단식하면서 명상을 하면 내가 욕심으로 하려고 했던 일, 어리석음으로 하려고 했던 일, 성질을 내면서 하려고 했던 일들이 모두 없어집니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정말 해야될 일 배고픔 속에서도 놓아지지 않는 일이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원(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은 그 뒤에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간절한 원일수록 자기를 돌이키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경건히 해야합니다. 이것이 곧 기도이며 수행입니다.”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중에서.

‘비운다’의 진정한 의미는 ‘버려야 할 것’과 ‘찾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그 기준은 지혜다. 아무런 지향점이 없이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지혜를 가리고 있는 욕심, 어리석음, 화 등과 같은 그릇된 생각을 비우는 것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그냥 ‘텅 빈 상태’가 아니라 ‘고요함’을 뜻하는 것으로, 지혜가 드러나는 바탕이다.

‘마음의 가난’을 강조하는 성경을 비롯해서 인류의 오랜 지혜전통은 ‘비움’의 의미와 지향점을 다양한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에는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표현이 있다. ‘밝은 거울과 같이 고요한 물’을 뜻하는 말이다. 흐르는 물, 혼탁한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다. 고요한 물(止水)이라야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밝은 거울(明鏡)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고요한 물’이 비워진 마음의 상태라면 ‘밝은 거울’은 지혜를 상징한다. 물이 흐름을 그치고 고요해지면(止) 그 물은 곧바로 밝은 거울이 되듯이, 생각이 고요해지면 곧 지혜(明)가 발현된다. 

그러나 ‘밝은 거울’이라는 지향점이 없다면 지수(止水)는 ‘흐르지 않고 괴여있는 물’일 뿐이다.

불교 명상 전통의 지관(止觀)은 생각을 비우되 무엇을 찾고, 어떻게 지향할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지(止)란 고요한 마음의 상태다. ‘보는 것’을 뜻하는 관(觀)은 지혜를 뜻하는 것으로, 넓게 보자면 지적 사유 활동을 포함하는 말이다. 

지관의 지혜(觀)는 ‘고요한 마음에 비춰진’ 것일뿐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적극적 활동이기도 하다. ‘비춰진 것’이 지혜의 수동적 모드(passive mode)라면 ‘비추어 보는 것’은 지혜의 능동적 모드(active mode)다. 동서양 전통에서 지혜는 흔히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내는 ‘밝은 거울’과 대상을 밝게 비추는 ‘빛’에 비유되어 왔는데 이는 각각 지혜가 작동하는 두 가지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관 전통은 ‘밝은 거울’과 같은 ‘수동적 모드’의 지혜 그리고 ‘빛’과 같은 능동적 모드의 지혜, 둘 다를 지향한다.

미륵보살의 ‘평온한 몰입’은 모든 상념이 멈춘 고요함(止)이 아니다. 고요한 가운데 활발한 사유(觀)가 작동하고 있다. 불교 명상 전통은 이를 지관겸수 혹은 지관쌍수라고 한다. 지(止)와 관(觀)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로댕의 ‘사람’이 보여주는 ‘치열한 몰입’이란 ‘지(止)가 부재한 가운데 대상에 집중하는 사유’를 말한다. 지옥의 문을 내려다보며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치열한 사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불안정한 자세와 긴장된 몸의 근육이 말해주듯 그의 마음의 상태는 고요가 아닌 고뇌의 상태다.

한편 ‘관(觀)이 부재한 지(止)’의 상태는 지향점이 없는 멍때리기와 유사하다. 많은 명상 지도자들은 차라리 망념이나 잡념을 하는 것이 ‘멍한 상태’보다 낫다고 한다. 생각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라면 잡념이나 망념을 돌이켜 지혜로 갈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만, ‘멍한 상태’에서는 지혜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이 ‘그친’ 상태와 생각이 ‘활발한’ 상태를 상반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멍때리기’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경향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도한 긴장과 몰입 상태를 해소하고자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마음의 진정한 휴식과 평화를 원한다면 ‘멍때리기’의 실질적, 장기적 효과는 없거나 미미한 정도다.

근년의 신경과학(Neuroscience) 분야에서는 최적의 의식 상태를 ‘이완된 각성’(relaxed alertness)’ ‘이완된 집중(relaxed concetnration)’ 혹은 ‘평온한 각성(restful alertness)’ 등으로 표현한다. 이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의미하는 바는 지관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관겸수의 상태다. 

이러한 상태는 공부 일 등에 있어 최적의 학습이 이루어지는 상태이며, 인지와 정서처리 기능이 활성화 되면서 정신 건강에 좋은 상태라고 한다. 또한 ‘이완된 집중’ 상태는 몰입한 후에 나타나는 피곤한 상태와는 달리 명료한 의식과 함께 에너지가 솟아나는 상태를 경험한다고 한다.

‘멍’하기만 한 상태를 혼침(昏沈)이라고 한다. ‘어둡고’ 바닥으로 ‘가라앉는’ 마음의 상태다. 어두운 마음보다 밝은 마음, 정신이 혼미한 것보다는 총명(聰明)함이 더 낫지 않겠나? ‘멍’만으로는 부족하다. ‘멍’과 함께 ‘명’(明)을 찾자.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49호 / 2022년 9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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