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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 법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기자명 진우 스님

완벽한 인과와 연기 세상서 어떻게 감정의 업 처리하는지가 관건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 등 4과는 도 깊이 말하는 등급
4과에 머물지 말라는 당부는 불과 또한 집착 말라는 가르침
사다함은 다시 우 범하지 않는 단계이니, 우리에게 가장 필요   

인도에 있는 산치대탑. 아쇼카 왕에 의해 세워졌다. [법보신문 DB]
인도에 있는 산치대탑. 아쇼카 왕에 의해 세워졌다. [법보신문 DB]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 급제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 출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 阿縟多羅三貘三菩提法 皆從此經 出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과 일체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 또한 불법이 아니니라.”

모든 부처님과 깨달음이 ‘금강경’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위(無爲)와 무루(無漏)를 말하는 것이니, 곧 더함이 없으니 모자람이 없고, 얻을 것이 없으니 잃을 것이 없으며, 나타남이 없으니 사라질 것도 없음이다.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요, 불법의 이치이다. 그러나 불법의 이치라 하는 즉시 불법의 이치가 아닌 것이 곧바로 나타남이니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 즉 이 또한 진정한 불법이라 할 수 없다 할 것이다. 복이란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다. 얻은 것은 잃고 사라지는 인과(因果)를 낳는다. 복이 다하면 사라지는 재물보시(財物布施)가 될 뿐이다. 그러나 사구게(四句偈)는 항상 머물러 사라지지 않고 변치 않는 묘법이므로, 법보시(法布施)가 됨이다.

고락의 과보가 같다는 것은 얻음과 잃음이 같이 생기고, 옳음과 그름이 같이 생기며, 즐거움과 괴로움이 같이 생긴다는 뜻이다. 바로 인과의 법칙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나 과학적으로도 얼마든지 증명되는 것이니,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똑같이 생기는 것은 연기(緣起)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얻음이라고 하면 이미 잃음이 생기기 때문에,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미 불법을 얻었으므로 불법을 잃는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진정한 불법이 아니라고 하시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는다고 하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이미 깨달음을 잃게 되는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신 것이다.

누구나 괴롭고 불행한 감정을 멀리 여의고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갖기 위해 살아간다. 열심히 살아간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을 얻기 위함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자존심을 얻기 위해 온갖 행태를 일삼고 발버둥치며 살아들 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가지면 괴롭고 불행한 감정이 함께 생기게 된다는 것을 좀처럼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벌써 행복이 생기면 당연히 불행도 생기기 때문이다. 이번 단원의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은 바로 즐거움, 기쁨, 행복 등의 상이 생기면 곧바로 괴로움과 슬픔, 불행이 생긴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알려줌이다. 그래서 하나의 상조차도 상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것 하면 벌써 저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한 상(相)조차도 상(相)이 없음)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스스로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은 소승불교에 있어서 4과라고 하는데 도의 깊이를 말하는 등급이다. 수다원은 초과로서 류(流)에 든다는 뜻이다. 즉, 성인의 경지인 성인류(聖人流)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일까?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를 봄에 있어서 견혹(見惑)을 다 끊었다는 것이다. 견혹이란, 일체의 보고 보이는 것에 대해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나머지 삼과(三果)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한다. 부처님께서는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미 불법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러하기에 가히 설할 것이 없다 하시었다. 그렇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은 설이 아니고 무엇이며, 부처님께서 가지신 불과는 이루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를 아신 부처님께서는 “내가 불과에 있으나 불과라는 상에 머물지 않으니 부처와 중생을 모두 떠났으므로 불과를 이룬 것이 없다” 하신 것이고,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얻었으나 이 법을 설하면 이미 정법이 아니되므로 설이 없다 하신 것이다. 이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4과를 얻은 아라한(阿羅漢)에게 먼저 성문승(聲聞乘)의 4과라는 상에 머물지 않고 얻어짐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진정으로 4과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심이니, 차후에 불과와 불법까지도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시다.

그러므로 수보리를 불러서 초과인 수다원과부터 물으신 것이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내가 감지하고 있는 나 밖의 일체 모습들은 연기의 모습이라 했다. 원인을 따지려는 것은 대단히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원인을 규정해 보려고 하지만, 실은 우주 삼라만상 자체가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생겨났다 머물렀다 변했다 사라지고 마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과정일 뿐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생각)으로 감지하려는 나의 마음이다. 보는 내가 편하면 좋은 일이 되고, 듣는 내가 불편하면 좋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연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래서 사실은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만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어디서 원인을 찾고 어디서 결과를 찾을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나를 포함하여 시방세계 전체가 생로병사 성주괴공으로 연기할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자의 업이다. 어차피 인과와 연기에 의해 한 치 오차 없이 돌아가는 세상인데,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만 좋고 싫고를 거듭하며 달밤에 홀로 춤을 추고 있는 꼴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들으며, 좋다 싫다는 감정의 업을 어떻게 처리 하는가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이 또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인데도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연기의 모습에 대해 육근이 간섭하지 않으면 수다원이라하시고, 만약 조금이라도 감정을 얹어서 이러쿵저러쿵하게 되면 수다원과가 아니라고 수보리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수보리언 불야세존 하이고 수다원 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須菩提言 不也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의 흐름 속에 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들어간 일이 없습니다. 빛, 소리, 냄새, 맛, 닿음, 법 등 육경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름을 수다원이라 합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물으신 뜻을 잘 아는 고로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이다. 수다원이 만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얻었다는 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므로 수다원(須陀洹)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일찍이 성인류(聖人流)에 들어간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색, 성, 향, 미, 촉, 법 등, 육진(六塵)의 경계인 육경(六境)에도 끌려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육경에 끌려들지 않기 때문에 수다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니,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육경(六境-색, 성, 향, 미, 촉, 법)에 끌려들지 않는다 함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맛, 촉감, 생각 등을 대한다하더라도,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좋고 싫은 구별은 할 수 있을지언정 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향 미 촉 법 등의 대상들은, 서로서로 주고받는 영향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애초에 좋다, 나쁘다거나,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육경의 대상을 구분을 짓고 좋다 싫다 분별하는 것은, 각자의 고락 업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인과로 인하여 생로병사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아라한(阿羅漢) 4과에 대하여 하나하나씩 부처님께서 물으시고 수보리로 하여금 대답을 하게 하시어 4과의 취득이 없음을 알리신 후에, 세존 자신께서 하시려던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다. ‘신천지’ 라는 기독교 계통의 신흥 종교가 코로나19와 맞물리면서 핫 이슈가 됐다. 기성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하여 개신교는 물론, 천주교와 성공회에서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한다. 근세에 들어 13계통의 종교에서 500여개에 달할 만큼 많은 신흥종교가 부침을 했다. 지금도 여러 신흥종교들이 활동하고 있으나, 대개는 유행처럼 왔다가 금방 사라지곤 한다. 지금은 역사가 가장 긴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와 기독교의 개신교, 천주교, 성공회, 이슬람교 등만 남아 있는 편이며, 그동안 수만 가지의 신흥종교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또한 인과와 연기의 소치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싫고 나쁜지는 결국, 각자 개개인의 업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므로, 시비고락을 섣불리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사 모두가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즉 부처님이 말씀하신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의 인과(因果) 현상이다. 좋은 것을 구할수록 싫고 나쁜 과보의 업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각자 스스로의 업이라 하겠다. 업이 좋은 사람은 좋고 싫은 분별심이 작은 고로, 싫고 나쁜 인연을 좀처럼 만나지 않게 된다. 반대로 업이 두터운 사람은 좋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이 크므로 그만큼의 큰 과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이 클 수밖에 없다. 만약 코로나19를 만나게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이는 내가 지어 놓은 좋고 싫은 분별, 업에 의해 인과 연기의 소산이라 할 수 있겠으나, 반대로 탐욕이 작고 성내지 않으며, 좋고 싫은 분별을 크게 하지 않는 사람은, 코로나19의 수만 배가 엄습한다 하더라도 악연의 고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과 업은 한 치 오차가 없기 때문이다.

조심하지 않고 무모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라 할 수 있겠으나, 진정한 불자라면 지나치게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 연기에 대한 신심을 굳게 가지고, 오히려 좋고 싫은 분별 인과 업을 멸하고자 기도와 참선과 보시에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오늘 강의하는 사다함(斯陀含)이란, 바로 한번 잘못보고, 한번 잘못 듣고, 한번 잘못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한번 잘못 생각한 이 후에, 다시는 잘못하지 않는 일래(一來)를 뜻하는 것이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잘못보고,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하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는 사다함(斯陀含)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52호 / 2022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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