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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열반경변④-막고굴 17굴 홍변영당(洪辯影堂)

기자명 오동환

한족 하서 회복 후 쇠락한 열반경변 ‘영당’으로 명맥 

1900년 드러난 막고굴 17굴…9세기 고승 소조상 모신 영당
나무 한 쌍·벗어 놓은 신발 벽화로 도식화된 열반 상징 보여
북벽에 그린 생활 도구는 원적 순간 초탈하는 것들의 시각화

막고굴17굴홍변상과 북벽의 벽화.
막고굴17굴홍변상과 북벽의 벽화.
장경동(17굴)에서 돈황문서를 반출하고 있는 폴 펠리오.문서들이 빠져나간 공간에서 북벽에 그려진 사라나무가 희미하게 보인다.
장경동(17굴)에서 돈황문서를 반출하고 있는 폴 펠리오.문서들이 빠져나간 공간에서 북벽에 그려진 사라나무가 희미하게 보인다.

중당(中唐, 766~825) 이후 돈황석굴에서 열반경변은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중당 시대의 종결은 토번의 점령기를 마치고 한족 세력인 귀의군(歸義軍)이 하서지역을 수복하게 된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 ‘죽음’을 소재로 한 열반경변은 그리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아무리 회피해도 일상을 형성하는 한 축으로 우리 주위를 맴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에 비록 돈황석굴에서 열반경변은 쇠락했지만, 그 도상은 다른 자리, 즉 고승의 상을 모신 영당(影堂)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열반의 의미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돈황에서 가장 유명한 석굴, 즉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는 막고굴 17굴은 1900년 당시 막고굴을 관리하던 도사 왕원록에 의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석실 내부에는 천년동안 잠들어 있던 각종 고문서와 불화들이 가득 차 있었고, 이것들은 오래지 않아 스타인, 펠리오와 같은 ‘외부자들’에 의해서 모두 반출되었다. 석실이 텅 비고, 1965년 이 굴의 본래 주인인 한 구의 고승상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비로소 17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17굴은 16굴의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에 작은 곁방처럼 조성되었으며, 내부는 북벽에 벽화로 장식하고 그 앞의 기단에 가사를 입고 단좌한 고승상을 안치한 단순한 구조다. 서벽에 새긴 비문에 의하면 이 상의 주인공은 9세기 하서지역에서 불교 지도자로서 활약한 고승 홍변(洪辯)이다. ‘오승통비’와 같은 돈황문서에 의하면, 홍변은 속성이 오씨로 어린 시절 출가해 수행과 경전에 모두 정통했으며, 821년부터 862년 입적할 때까지 돈황불교를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했다. 홍변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그의 돈황불교 영도자로서의 위상은 토번 점령기에서 장의조의 귀의군 정권기로 넘어가는 정치적 변동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돈황 수복 후에는 당황실로부터 승통의 직위를 책봉받았다.

외부를 떠돌다가 제자리를 찾은 홍변상은 북벽에 그려진 벽화와 어우러져 천년의 시간 동안 잊혔던 한 장면을 다시 완성했다. 반쯤 내려감은 눈과 굳게 다문 입술 끝에 살짝 걸린 미소는 엄중함과 인자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다소 매끄럽지 않고 굴곡지게 처리된 두상, 또렷하게 드러난 눈두덩 윤곽, 이마와 눈꼬리, 입가에 섬세하게 표현된 주름 등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마치 대사의 생전 모습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돈황문물연구소 측은 상을 안치할 당시, 상의 뒷면에 자리한 복장구(腹藏口)를 통해 상 내부에 대사의 골사리가 납입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소조상은 홍변대사의 생전 형상과 사리가 결합된 ‘진신’이며, 17굴은 홍변의 진신을 모신 영당굴(影堂窟)인 것이다. 

북벽에는 잎이 무성한 두 그루의 나무가 홍변상 양쪽에 드리워져 있고, 각각 행낭과 정병이 걸려있다. 나무 밑에 지팡이를 든 시녀와 부채를 든 승려가 마주 보며 서 있다. 홍변상이 안치된 방형의 기단 서측에는 한 쌍의 신발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대사의 생전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었을 법한 도구들을 그의 영당에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사의 생전 일상이 사후에도 영속되기를 기원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과 관련해 두 가지 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열반경’에서 대중들은 세존이 열반을 준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고 비탄에 빠지면서도 “오늘 우리는 사라쌍수 숲으로 가야 한다”고 외친다. ‘대반열반경후분’에 의하며 세존이 열반하시는 자리엔 본래 동서남북에 각각 두 쌍씩 여덟 그루가 자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존이 반열반하신 순간, 사라수 동쪽과 서쪽이 한 나무가 되고, 남쪽과 북쪽 두 쌍이 합하여 한 나무가 되어 한 쌍의 사라수로 남았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마치 한 그루의 보리수가 여래의 정각을 상징하듯이, 한 쌍의 사라수는 여래의 열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관념은 ‘장선재막진찬병서(張善才邈眞贊幷序)’에서 “쌍림이 학으로 변하니 7부중이 슬픔에 잠긴다”라고 표현한 예에서 보여지듯, 당대 돈황에서도 만연했다.

신발을 홍변상의 정면에 해당하는 남측에 배치하지 않고 서측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대중국에서부터 “신발을 벗는다[脫履]”는 말은 세상사에 초탈하고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측면은 불교와도 부합하여 당대(唐代)에는 문학계나 불가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돈황문서 ‘사주지(沙州志)’에 의하면, 금광명사의 왕화상(王和尙)은 임종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부촉하기를 “내가 죽은 후, 내 몸을 의자에 앉히고, 서쪽으로 향하게 하라” 했다. 장례를 치른 후 제자들이 살펴보니, 의자는 그대로인데, 화상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곳곳을 찾아 헤매니 수창땅에 이르러 화상의 신발 한 쌍을 발견하였으나, 화상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경덕전등록’ 3권에서는 달마대사가 입적한 지 3년 후에 위나라 송운(宋雲)이 서역에서 사절단을 보필하고 돌아올 때, 총령(葱嶺)에서 대사를 만난 이야기를 전한다. 대사는 그때 손에 신발 한 짝만 들고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송운이 “대사여,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서천으로 가네”라고 대답했다. 후일 효장왕이 즉위한 후 송운이 그 일을 아뢰었다. 황제가 관을 파보게 하니, 빈 관에 신발 한 짝만 남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들을 참고해 보면, 홍변상의 기단 서측에 그려진 신발은 홍변의 생전과 같이 신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신발을 벗음(즉 세속을 벗어남)’을 표현하기 위한 도상적 장치임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북벽에 그려진 고승을 위한 생활도구들은 사후에도 마치 “살아있을 때와 같이” 모시고자 하는 남겨진 이들을 위한 도상임과 동시에 그(고승)가 원적의 순간 초탈하게 될 것들을 시각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ory88@qq.com

[1653호 / 2022년 10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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