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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깨어남의 길과 성장의 길

현장 떠난 불교는 ‘종이 위 그려놓은 호랑이’ 불과

문헌 통해 ‘깨달음 논쟁’ 설명한들 불자들 삶에 도움되지 않아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 깨달음은 기껏해야 추상일 뿐
부처님 모습 ‘지금 여기’서 새롭게 재현해내는 일은 우리의 몫 

지난해 7~10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된 백남준의 ‘반야심경’.[국립현대미술관] 
지난해 7~10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된 백남준의 ‘반야심경’.[국립현대미술관]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란 생소한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된 지 오래다. 맥락에 따라 ‘일’과 ‘개인 생활’의 균형 혹은 (생계로서의)직업과 (자신의 삶을 위한)생활의 균형을 뜻한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서 바람직한 생활방식으로 권장되고 있지만, 삶의 온전성을 몰각한 우리들의 슬픈 처방책일 뿐이다. 자본과 시장 중심의 세계에서 개인이 다양한 형태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가운데 인간의 삶은 분절화되어, 일이나 직업은 오직 밥벌이의 수단일 뿐, 삶의 보람이나 인생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삶의 분절화 문제는 ‘밥벌이’로서 직업의 문제만은 아니다. 종교 혹은 수행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오늘날의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삶을 위한 일종의 ‘운영체계’(OS), 곧 PC의 윈도우라든가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 등과 같은 것이다. 컴퓨터에서 문서작성, 뉴스 검색, SNS 활동 등 일상에 편리한 다양한 앱이 구동 가능한 것은 운영체계라는 플랫폼이 있어 가능한 것이고,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앱을 설치하는 것도 가능하다. 

종교는 원래 ‘삶’의 운영체계와 같은 것이다. 삶의 모든 활동, 직업, 육아, 인간관계 등 의식주를 비롯하여 삶의 모든 주기와 과정을 일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분절화 된 삶에서 종교는 단지 하나의 ‘앱’으로만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앱은 필요시에만 사용한다. 스마트폰에서 일기예보 앱을 켜듯이 나의 일상에 ‘종교’라는 앱이 필요한 경우에 잠시 켤 뿐이다. ‘종교 생활을 하십니까’의 질문은 ‘종교라는 앱을 가지고 있나요’라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예 앱을 설치하지 않거나 기존에 있던 앱도 제거해 버린 경우도 많다. 앱이 무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오늘날의 탈종교 현상이다. 

이러한 종교 일반의 문제점 이외에 불교의 경우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깨달음에 관한 문제다. 불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견이 없다.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종교일 뿐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에 관한 거의 모든 담론과 연구들은 깨달음 그 자체를 규명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조차도 문헌적 연구나 역사적 연구에 한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 ‘화엄학에서의 깨달음’ ‘선(禪)적 깨달음’ 등 깨달음에 관한 과거 문헌을 중심으로 한 담론이거나 연구들이다. 문헌적 연구가 불필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불교학에서 문헌 연구는 중요하며 지금보다 더 많은 학자들과 스님들의 집중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깨달음’을 중심 한 논의나 연구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불교인들-출가자이건 재가자이건-의 수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보통의 불교 신자들이 불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깨달음에 대한 설명은 추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교적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깨달음에 관한 추상적 설명이 아니라 깨달은 자가 살아가는 구체적 모습이다. 

문헌을 통해 깨달음에 관한 설명을 아무리 한들 그것은 ‘종이에 그린 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삶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 깨달음은 기껏해야 추상이거나 대체로 허구일 뿐이다. 깨달음의 요체가 지혜와 자비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라고 하는 구체적 삶을 떠난 지혜와 자비는 허구적 개념이거나 그냥 말일뿐이다. ‘나는 사랑이 충만한 자’라고 주장한들 구체적으로 아무런 사랑하는 대상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말일 뿐인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구체적 상황과 현장을 떠난 ‘지혜와 자비’는 종이 위의 호랑이와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람을 떠난 깨달음은 무의미하다. 사실 그런 깨달음은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 한국불교에서 회자 되는 깨달음의 이야기는, 신행의 관점에서 보자면, 누가 호랑이를 잘 그리냐를 두고 다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한국불교에서 종종 언급되는 깨달은 선지식의 모습은 깨달음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과 거리가 먼 경우도 많다. 많은 경우 기행과 기연으로 드러나는 선지식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깨달음의 경지로 드러나는 지혜와 자비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우리 같은 범인(凡人)의 눈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계일 뿐으로 생각하고 만다. 

사실 문헌을 통해 재현되는, 혹은 세대를 통한 기억으로 전승되는 선지식의 살아가는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기보다 그 선지식이 살아가던 시대의 ‘문법’으로 그려진 모습이다. 그래서 맥락적 이해가 중요하며, 과거 선지식의 삶의 모습을 단순히 모방·재현하는 것은 오늘의 맥락에서 무용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이 점은 부처님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20세기 이후 서구불교학의 영향 속에서 빠알리 불교를 근본으로 삼는 ‘파알리 본질주의’ (Pali essentialism)가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늘날 한국불교계의 경우 초기경전이 그리고 있는 부처님의 삶만이 부처님의 모습이고 불교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초기경전이 그려내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은 당시 바라문교라고 하는 ‘역광’(逆光) 그리고 당시 인도의 독특한 종교문화인 사문전통의 출가중심주의라는 ‘필터’를 통해 그려낸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가 그려내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 또한 중요하다. 출가와 재가의 이원적 사회구조가 아닌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라는 또 다른 시공간에서 재현되는 부처님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승이란 필터를 통해 드러난 부처님의 모습을 ‘지금 여기’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재현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최근 켄 윌버(Ken Wilbur)는 불교가 추구해 온 ‘깨달음의 길’과 서양심리학과 사회과학이 추구해 온 ‘성장의 길’을 통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켄 윌버에 따르면 ’깨어남의 길’이 내면탐구를 통한 자아초월의 길이라면 ‘성장의 길’은 ‘나와 세계’의 관계 정립을 통한 의식단계의 발달을 위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깨달음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를 통합하고자 했던 대승불교의 보살행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라는 생각도 든다. ‘과거’라는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인 지금의 한국불교를 생각할 때 켄 윌버의 통합적 비전과 대승의 보살행이 한 돌파구가 될 수 없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불교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한 사람의 깨달음이 만 사람의 깨달음”으로 확산되어 온 역사다. 마찬가지로 깨달음 그 자체는 영원·보편적 진리이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모습인 ‘깨달음의 삶’ 곧 깨달음의 실천 모습은 늘 지금 여기의 시공간에서 새롭게 구현되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른바 불변수연(不變隨緣)의 역사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53호 / 2022년 10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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