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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

기자명 진원 스님

나는 요즘 가을걷이에 참 바쁘다. 봉숭아, 맨드라미, 부추씨, 벌개미취, 등심붓꽃씨 등을 가을 햇볕에 말리는 등 가을걷이에 손길이 바쁘다. 짚단을 가져다 아직 어린 수국을 감싸서 겨울을 준비하기도 한다. 등에 닿는 햇살이 참 따뜻하고 평화롭다.

어린 시절, 가을철 엄마는 고구마도 캐고 들깨도 털고, 콩 타작도 하고 무척 바빴다. 어린 딸도 손길을 보태기 바랐다. 늘 하던 말이 “봄에는 집안에 있는 모든 씨앗이 들판으로 나가고 가을이면 밖으로 나갔던 모든 것들이 되돌아 곳간을 채운다”고 했다.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그 나이가 되어 보니 굼벵이가 파먹은 고구마도 소중하고 씨앗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값지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중요한 가을 행사가 문창호 바르기이다. 겨울 북풍을 막아줄 창문 새로 바르는 문창호는 단풍잎, 코스모스, 은행잎 등을 넣어 햇볕에 말렸다. 눈부시게 하얀 창호지에 내려 않은 붉은 고추잠자리는 참 한가로웠다.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고 정서적인 여유가 있었다.

출가해서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가을보다 참 척박했던 기억이다. 100명이 넘는 대중이 겨우내 먹을거리를 마실에서 추수하고 남은 깻잎이며 고추잎, 고구마순 따러 다니는 일이 일상이었다. 산에서는 산초를 따고 참 부산했던 가을이었다.

그런가 하면 고즈넉한 저녁이 되면 행자바위(행자들이 산에 가서 염불 연습하던 바위를 우리는 행자바위라고 불렀다)에 올라 가을 달빛 아래 나옹선사의 토굴가 한구절로 
“청산림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운율을 넣어 멋을 부리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가을이 어디로 갔을까?

한 갑자를 돌만큼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장년시절 가을의 추억이 거의 없다.

출가자라고는 하지만 소임이 바쁘다는 핑계로 밤과 낮이 함께 맞물려 돌아갔다. 요즘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년시절처럼 지금의 현대 사람들도 유년시절로 돌아가면 자연을 벗 삼아 사계의 추억 한 자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는 가치실현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먹고 사는 문제에 치어서 가을다운 가을 단상을 느껴보기는 했을까 싶다. 

불안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래도 치유 받을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상을 벗어나 만물이 풍요로운 가을로 들어가 보자. 이 가을이 얼마나 좋은가. 잠시라도 불안에서 벗어나 가을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온통 담구어 보자. 고구마도 캐고, 사과도 따보고, 일손도 도와보고, 가을을 맞이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늙은 호박 한 덩이 얻어 올 수 있는 좋은 일도 있지 않을까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게 요즘 나는 가을의 한가운데 들어와 산다. 오늘도 우리 동네 일상은 길가의 내다 널어놓은 고추, 동네 어귀 골목길 위에 말리는 벼, 시골 담을 빼곡히 덮은 담쟁이가 단풍보다 더 붉은 가을이다. 

마을 이장님이 들깨 걷이에 한창이다. 지나다가 “제가 좀 거들어 드릴까요?” 여쭈니 “아이고 들고 다니다 깨 다 쏟아져요. 시님(스님)이 뭘 할 줄 안다고….” 그냥 가라 한다.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가을은 생각보다 짧다. 그래서 늘 말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이 한 달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 굳이 핑계가 바쁘다거나 여유가 없어 한적한 가을을 맞이하기가 힘들다면,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오늘은 지하철이나 승용차 말고 일부러 버스를 타고 출퇴근 하는 일상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길가의 은행나무와 붉은 담쟁이 넝쿨 옆 단풍이 회색도심을 화려하게 꾸민 가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시골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신 고구마가 있어 가까운 지인과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내 마음은 더 풍요로울 것이다.

하늘은 시리게 푸르고 땅위에 모든 것들은 황금색과 붉음으로 빛난다. 아직 가을은 들판에 가득하다.

진원 스님 계룡시종합사회복지관장 suok320@daum.net

[1655호 / 2022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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