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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지 조성, 일제 신사건립 쏙 빼닮았다"

  • 교학
  • 입력 2022.11.04 21:05
  • 수정 2022.11.05 09:38
  • 호수 1656
  • 댓글 6

이창익 고려대 연구교수, 11월1일 전국비구니회 전문가 특강서 발표
주어사 성지화 첫 단추 ‘남상철’ 조명…‘일본 신사참배 경험’ 반영 추정

천진암·주어사 가톨릭 성지화가 남상철(1891~1978)이라는 인물로부터 비롯됐으며 한국 가톨릭 성지화 사업이 일제강점기 신사건립 추진과 닮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가 11월1일 전국비구니회관 메따강당에서 열린 전문가 초대 특강에서 논문 '일제강점기 성지참배와 성지 조성 출현 그 지속에 대한 생각'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천진암·주어사 성지 개발에 불씨가 된 인물로 남상철을 꼽았다. 그의 할아버지인 남종삼(1817~1866)은 1968년 가톨릭 복자(福者)로 인정돼 1984년 여의도 시성식에서 성인(聖人)으로 추증된 인물이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남상철은 정약용이 쓴 권철신 묘지명에 근거해 1960년대 초 주어사·천진암을 찾았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조선사찰조람' 편찬을 위해 준비한 원고에서 '천진암이 경기도 광주 앵자산에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남상철은 옛터를 조사한 뒤 1962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경향잡지'에 세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 발견 됨"을 게재한다. 한국 가톨릭은 남상철이 글을 게재한 시점으로부터 12년 뒤 천진암 터 매입을 시작했다. 1979~1987년 창립선조 5위(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승훈)의 묘와 그들 직계가족 묘를 천진암으로 이장했고, 1986년부터 100년 계획을 세워 대성당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교수는 남상철이 천진암·주어사 가톨릭 성지화 시작점으로 파악, 그의 행적을 집중 탐색했다. 남상철은 일제강점기 음성 지역 유지이자 자산가로, 1921년부터 감곡면장(감곡금융조합장)과 충북도회 의원으로 20여년간 재직했다. 의원 시절 1939년 4월 동료 의원과 2주간 일본 시찰을 떠나, 일본 신궁(神宮)과 신사(神社)를 참배한다. 남상철이 방문한 곳은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세신궁(伊勢神宮), 메이지천황이 묻힌 모모야마어릉, 가시하라신궁(橿原神宮) 등이다. 

이 교수는 성지참배 사례 19곳을 분석해, "1940년을 기점으로 일본 신사·신궁 성지참배단 행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그 근거로 일제강점기 후반 '성지'라는 말을 독점한 두 곳의 신사 '부여신궁'과 '소시모리신사'를 조명했다. 1939년 착공된 부여신궁은 1925년 서울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과 조선의 대표 신사였다. 이 교수는 부여신궁이 건립 당시부터 "성지 부여" "성지 부여신궁"으로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조선 신궁.
조선 신궁.

춘천 우두산에 건립 추진된 소시모리 신사도 이미 '성지'라는 이름으로 수식되고 있었다. 소시모리 신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신화에 나오는 스사노오 미코토의 행적을 찾는 데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 식민지가 된 조선 영토에서 '일본서기' 기록된 소시모리(曾尸茂梨)가 어디인가를 비정하고자 했던 것과 연관이 있다. 소시모리를 ‘소의 머리’라는 뜻으로 해석, 한자 표기인 우두(牛頭)산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우두산은 전국에 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재해석과 논쟁이 시작됐다. 경주설, 가야설, 춘천설이 등장했다. 결국 일제 신사정책 강화 속에 '춘천 우두산'에 소시모리신사가 건립되기 이른다. 

그렇다고 신사 건립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우두산은 김씨 문중 소유지였다. 500여기의 문중 묘가 있었다. 신사를 건립하려면 이를 이장해야 했다. 춘천군수는 문중 대표 김교림 등 5~6명을 불렀고, 묘 이장을 권했다. 김교림은 “자손 도리로서 조상 묘 위에 신사를 건립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했다. 그럼에도 결국 토지 문제는 해결됐고 신사 건립은 추진됐다.

춘천군수와 읍장이 1935년 2월9일 도청을 찾아가 신사 건설 구체안 보고와 건설비 보조를 간청했고, 2월12일 고고학자 가토 간가쿠 초청해 학계의 지지를 이끌었으며 2월16일 신사건립 발기인회 취의서 제출, 3월30일 지사와 관민 800여명의 기념식수, 이듬해 4월3일 벚나무·전나무 1000그루 기념식수, 1937년 4월18일 벚나무·소나무 600그루 등 몇 년간 건립 추진을 위한 행사를 이어갔다. 1937년 1월23일 유적 정화 찬성을 받아 10월27일 우두산에 ‘성지’라는 안내표를 건립하기 이른다.

특히 춘천유적보존회·번영회는 "이곳이 스사노오가 거주한 곳이지만 학자끼리 의견이 분분해 단정적 고증을 얻지 못했을 뿐"이라며 "강원도민이 10여년 간 조사해 이제는 '성지'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1942년 소시모리 정화회는 "정신적 황민화는 숭고한 사실에 의해 구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화 운동을 강화했다.

이 시기의 신사참배 경험과 신사건립이 해방 이후로도 우리나라 종교의 성지 순례와 성지 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이 교수는 분석했다. 특히 그는 '가톨릭 성지 조성'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교수는 "일본은 신사를 건립해 온갖 신화를 땅에 새기고자 했다"면서 "종교들 가운데 한국 가톨릭이 이 작업을 적극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천주교회사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을 모두 땅에 새겨서 성역화했고, 성지로 만들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일제강점기 신사 건립 과정과 겹쳐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한국 가톨릭이 천진암대성당 자리를 통해 한국천주교회의 지리적 중심을 확립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이는 "소위 외래종교가 갖는 컴플렉스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55호 / 2022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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