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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3)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26)

이기영은 불교적 이상구현 관점에서 거사불교로서 원효불교 발견

일제 초기 민족의식 고취 영웅전기 간행되며 원효 스님에 주목
70년 이후 중관·유식 통합 연구한 고익진, 원효연구 괄목 성과
이기영은 학술연구 넘어 원효불교를 현장 실천 운동으로 승화  

이기영 박사는 원효의 일심개념을 서양철학에 대비시키는 등 원효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기영 박사는 원효의 일심개념을 서양철학에 대비시키는 등 원효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 

1930년 최남선(崔南善)은 통불교론을 제창하여 원효불교 이해의 신기원을 열었다. 최남선은 통불교론으로 원효불교의 우수성을 주장하였고, 나아가 아시아불교의 역사에서 원효불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하였다. 동시에 한국불교사 자료들을 발굴 소개함으로서 불교사 연구의 기반을 조성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요된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최남선의 한국학 연구는 굴절을 겪으면서 발전의 길이 막히었고, 원효불교의 연구도 중단되고 말았다. 더욱이 해방 뒤의 계속된 불교계의 혼란 상황은 최남선으로 하여금 불교계를 완전히 떠나게 하였다.

비구와 대처 싸움이 시작된 다음 해인 1955년 12월 17일 마침내 ‘한국일보’에 “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는가?”라는 개종 이유를 밝히는 장문의 글을 게재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밝힌 개종 이유는 불교가 더 이상 건국 입교(立敎)의 정신적 지주됨을 담당할 수 없겠다는 실망감 때문이었다. 

한편 한말 일제 초기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 국학자들은 국사연구를 통하여 민족적인 기개와 자존심을 앙양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을지문덕·강감찬·최영·이순신 등의 영웅전기를 간행하였다. 역시 민족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장도빈(張道斌)은 민족적인 문화위인으로서의 원효 전기 ‘위인 원효’를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에서 간행하였다. 이 원효전에는 원효의 행적과 함께 원효의 저술 49부97권의 목록을 게재함으로서 그 다음해 정황진(鄭晄震)이 원효의 저술 87부223권의 목록을 다시 작성하여 ‘조선불교총보’ 13호에 게재하는데 영향을 미쳤다(장도빈은 1924년 자신이 설립한 고려관에서 다시 재간하였다). 그런데 장도빈의 원효 전기를 계승하면서도 민족적인 문화영웅에서 개인적 파계와 인간적 고뇌의 인물로 원효상을 크게 바꾼 것은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원효대사’였다. 

이광수가 이 소설을 발표한 1942년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한창 강요되던 때로서 고뇌하는 원효상에 일제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을 투영하여 원효의 파계를 ‘보살의 자비행’으로 해석함으로써 중생을 위한 자비행으로 위안 삼고자 하였다. 이광수가 그려낸 원효상은 불교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효상이 과연 역사적인 인물인 원효의 실체에 얼마나 근접한 이해인지는 의문이다. 7세기 신라의 사회와 불교의 발전에 기여한 원효의 역할을 재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된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학 분야의 연구가 전반적으로 부진한 가운데 불교사 분야의 연구도 역시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이와 같은 척박한 연구 풍토에서도 최남선의 통불교론은 원효불교 이해의 기본적인 학술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론의 담론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불교사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조명기(趙明基)·박종홍(朴鍾鴻)·민영규(閔泳珪)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국불교사학의 제2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가운데 특히 조명기는 일제강점기의 한국불교사 연구자들과 해방된 뒤 동국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배출된 연구자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세대로서의 역할을 평가받는 인물이다.

1962년에 출간된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는 신라시대의 대표적 학승인 원효·의상·원측·태현·경흥 등의 저술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신라불교의 역사적 위치를 정립시키려고 한 것인데, 원효불교를 중심으로 한 신라불교사상의 특성을 ‘통화성(統和性)’ 또는 ‘총화성(總和性)’으로 규정하였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별기’를 특정하여 다룬 것은 아니지만, 원효를 한국불교의 출발점으로 지목하고 그것으로부터 한국불교의 특징을 추출하려고 의도하였다는 점에서 최남선의 통불교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한국의 불교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명기에 이어 원효불교에 대한 학문적 성과로서 주목되는 것은 박종홍이 1960년대 ‘한국철학사’라는 제목으로 ‘한국사상’에 연재했던 글들이다. 박종홍은 불교학자이기 이전에 서양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뒤늦게 한국의 전통사상에 관심을 갖고 한국의 불교사상가 가운데 고구려의 승랑, 신라의 원측과 원효, 고려의 의천과 지눌의 사상을 정리하는 가운데, 특히 원효사상을 화쟁론적 접근방법에 의해 본격적으로 규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원효의 불교사상에 대한 학문적 분석으로서는 최초의 시도로서 철학의 영역 안에 원효사상을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원효사상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최남선의 논의로부터 탈피한 것이 아니고, 학문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한편 조명기와 박종홍과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원효 불교에 접근한 연구자로서 민영규가 주목된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불교학계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하였으나, 원효불교와 신라의 불교학 저술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을 내었다. 민영규의 학문적 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라인들의 불교저술의 종합목록(新羅章疏錄 長篇-不分卷, 1959)으로서 당시로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의 조사 결과였다. 또한 해방된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원효론’(사상계,   1953.8)을 게재하여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과 유식학의 통합불교를 화엄학으로 이해하고, 원효의 화엄학이 중국의 화엄학 성립에 미친 영향을 지적하였다. 앞서 1918년 김영주와 1930년 최남선이 이미 지적하였던 내용이지만, 중관 유식의 통합 문제는 1970년대 이후 불교학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주목받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논란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 

중관과 유식의 통합 문제에 관한 논란에서 가장 주목되는 학자는 고익진(高翊晉)인데, 그는 원효의 중심사상으로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을 주목하고, 일심의 두 측면인 진여문과 생멸문에 중관과 유식을 대응시켜 중관과 유식 사이의 대립을 화쟁시킨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익진의 연구는 원효의 기신론관의 구체적인 이해를 통해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 연구를 크게 진전시킨 성과로 평가된다. 이후의 연구사적 과제는 원효가 실제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 논리구조에 의거하여 중관과 유식 사이의 쟁론을 해결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원효는 처음 ‘별기’의 대의문에서 이 문제를 크게 강조하였으나, ‘별기’의 본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체계적인 주석서인 ‘소’에서도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없어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중국 화엄교학을 대성시킨 법장(法藏)이 ‘대승기신론’을 여래장연기종으로 교판하고 중관과 유식을 통합하는 정치한 논리체계를 수립하였던 것과 대조된다. 중관과 유식을 통합하는 관점과 논리에서 원효와 법장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그러한 차이는 두 사람 불교의 최종의 중심적인 경전인 ‘화엄경’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효가 가장 중시한 경전은 ‘대승기신론’과 ‘화엄경’이었고, 법장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원효 불교를 계승하거나 재발견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두 경론을 존중하였는데, 8세기 후반 9세기 초의 태현·견등·표원, 11세기 후반의 의천, 20세기 초반의 최남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의천은 두 경론을 ‘웅경(雄經)’과 ‘위론(偉論)’이라고 지칭하면서 최고의 경과 논으로 받들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원효 연구, 특히 원효의 ‘대승기신론’의 주석서(疏와 別記)에 대한 연구는 획기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대 한국 불교학계의 대표적인 원효 연구자로 꼽히는 이기영(李箕永)이 루벵대학에 유학한 뒤 귀국하면서 한문불전 외의 본격적인 불교원전 연구가 시작되었고, 원효 연구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그의 첫 번째 저술인 ‘원효사상1-세계관’이 1967년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승기신론소’와 ‘별기’에 대한 전면적인 해설서로서는 최초의 성과인데, 서설 부분에서 ‘대승기신론’의 중국 위찬설(僞撰說)에 대한 간단한 해제를 붙이고, 이어 원효의 사상과 신념이 전체적으로 ‘대승기신론’의 원리로 총화되어 있다는 점과 원효불교에서 ‘소’가 차지하는 위치를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그런 연후에 ‘소’와 ‘별기’의 원문과 번역을 제시하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상세한 해설을 붙였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는 ‘대승기신론’의 본문과 원효의 ‘소’와 ‘별기’ 사이의 동이점(同異點), 대표적인 ‘기신론’ 주석자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현대 연구자들의 해석까지 비교하여 설명하여 주었기 때문에 이후 연구자들에게 충실한 안내서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곧 최초의 현대어 번역과 해설서로서 이후 연구에 지남의 역할을 하면서 불교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기영의 원효불교 연구는 1990년대 전반까지 지속되었는데, 1974년에는 ‘교판사상에서 본 원효의 위치’를 발표하여 중국의 역대 교판론과 비교하여 원효의 4교판의 특징을 지적하였고, 1975년에는 ‘경전인용에 나타난 원효의 독창성’을 발표하여 원효와 중국의 혜원·법장의 기신론 주석서들에 보이는 경전 인용의 차이점을 비교하였고, 1976년에는 ‘원효의 입장에서 본 야스퍼스의 das Umgreifende(포괄자)’를 발표하여 원효의 일심 개념과 서양철학의 개념을 대비시키는 등 원효를 보는 시각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였다.

그런데 이기영의 원효 연구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원효를 거사(居士)의 관점에서 시종 일관되게 접근하여 그의 불교를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거사불교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원효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사상의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원효불교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기영은 이러한 불교관을 바탕으로 하여 1974년 불교의 학문연구와 대중화를 위하여 마침내 한국불교연구원(韓國佛敎硏究院)을 창립하였다. 

먼저 연구원의 학문적 활동으로서는 각종의 주제를 갖고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불교연구서들과 학술연구지 ‘불교연구’를 간행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운동으로서는 원효학당을 운영하고 일반인과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강좌를 개설하여 불교경전과 불교사상을 교육시키고 있다. 그리고 각지에 신행 활동을 위한 구도회를 창립하고 지역사회에서의 봉사활동 등의 실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연구원은 이렇게 학문연구와 실천운동을 병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연구단체나 신행단체와는 구별되며, 오늘날까지 5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도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원효를 재발견한 인물 가운데 11세기 후반의 의천은 불전의 수집과 간행과정에서 원효 불교의 의의를 발견했으며, 19세기 중반의 최남선은 일제의 식민지불교와 대항하는 과정에서 원효 불교의 의의를 발견하였던 데 비하여 현대의 이기영은 불교적 이상의 구현이라는 시각에서 거사불교로서의 원효불교의 의의를 발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7세기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한 사상가, 그리고 무애의 보살행을 펼쳤던 대중교화사로서의 두 얼굴을 가진 거사 원효의 모습이 한국불교사에서 잊혀진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57호 / 2022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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