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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감정 시대의 대처법

기자명 남춘호

“배송 시간이 지연됐으니, 회수해 가라.”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29층까지 걸어 올라간 배달 기사가 고객에게 들은 말이다. 게다가 고객은 별점 1개와 부정적인 리뷰를 남겼다. 이후 관련 내용이 방송을 통해 퍼지자, “늦어진 아이들 끼니 때문에 예민해진 탓에 너무 제 입장만 고수한 것 같다”며 사과했다. 고객의 갑질이었을까, 정당한 권리였을까, 아니면 복잡한 조건이 초래한 모두가 불행한 상황이었을까.

|최근에는 개인화, 더 나아가 초(超)개인화로 인하여 사회정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갑질의 이면에선 기존의 사회정의를 자신이 만든 정의로 대체해버린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셀프(self) 정의’ 또는 ‘이기적인(selfish) 정의’라 부른다. 세계화와 생산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대부분의 필요한 재화를 집 안에서 주문하고 받을 수 있다. 정보통신, 즉 인터넷의 발전으로 더 이상 누군가에게 질문하지 않아도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개인으로 살아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도시화를 통해 개인화가 시작되었다면, 인터넷을 포함한 생산기술의 발전, 세계화, 소비주의 확산으로 인해 개인화가 가속화되면서 초개인화로 이행하고 있다. 셀프 정의는 사회가 개인으로 재분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셀프 정의의 중요한 기반은 ‘과잉 감정’이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인다면, 최근 사회의 추동력도 사실 기반이 아닌 과잉된 감정인 듯하다. 누가 더 감정을 더 격하게, 또는 더 세밀하게 표현해 공감을 이끌어내는지가 실제 사실의 검증보다 중요해지는 듯하다. 물론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고, 공감을 이루는 능력은 협력 구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사실에 기반하지 않거나, 또는 사실이 아닌 것까지 억측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석학들도 현장에서 강연한 내용은 감정이나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글로 내용을 다시 정제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다. 석학들도 이럴 지인데, 범인들이 감정과 상황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 달 전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우리가 우선해야하는 것은 유가족과 국민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만 할 수는 없다. 정치인들은 이를 과잉 감정으로 가져가 정쟁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들이 과잉 감정화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 기반이 아닌 사실 기반의 철저한 조사를 해야 한다. 이 조사의 목적은 누군가의 잘못을 단순히 비난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보다 변화시켜야 할 지점을 찾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의 책 ‘팩트풀니스’에서는 인간의 본성 열 가지를 제시한다. 그중의 하나가 ‘비난 본능’이다. 비난 본능은 안 좋은 일의 발생 원인을 단순한 이유에서 찾으려는 본능이다. 예를 들어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잘못으로 한정시켜 비난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영향력을 과장하다보니, 진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의 연기론에서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此有故 彼有)고 말한다. 또한 불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무상(無相)’은 범어 ‘아니티야(anitya)’의 한역인데, 무상은 ‘매 순간 변화하는 현실을 바르게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기론과 무상은 현상을 올바르게 직시하여 분명하게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피상적인 메커니즘이 아닌, 삶의 실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계는 근거에 기반한 과학적 방법론에 적합하지만,  통계나 데이터분석 등의 근거 기반의 기획은 부족한 경향이 있다. 불교계가 과잉 감정이 아닌 다양한 근거기반의 정책을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기를 기대해본다.

남춘호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연구위원 namchoonho@naver.com

[1659호 / 2022년 1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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