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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4)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27)

연구성과 증가에도 원효 생애와 사회적 역할 이해 여전히 설화적 수준

원효불교 전승 살펴보면 한국불교사에서 주류였던 적이 없어
간화선 중심인 현재의 불교계에서도 원효불교는 여전히 변방
원효불교는 국제적이면서 또한 사회변화 부흥한 역사적 산물  

경주 분황사화쟁국사비부. 경북 유형문화재 제97호. [문화재청]
경주 분황사화쟁국사비부. 경북 유형문화재 제97호. [문화재청]

1930년 최남선(崔南善)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불교-그 동방문화사상에서의 지위’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통불교론을 제창함으로써 원효불교 이해의 신기원을 열었다면, 1967년 이기영은 ‘원효사상1-세계관’이라고 하는 저술을 출간하여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에 대한 전면적인 해설을 시도함으로써 원효불교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새장을 열었다. 

동시에 이기영은 원효불교를 거사의 관점에서 시종일관 접근하여 유마(維摩)거사를 종교적 전범으로 삼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실천운동의 새 길을 개척하였다. 그런데 70~80년대는 원효의 통불교론이 국토개발 및 반공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면서 사회의 통합 원리, 나아가 남북통일 이념으로까지 몰고 가려는 주장으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왜 원효인가?”라는 주제로 1987년 10월 27일 국토통일원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학술회의에는 국내외 학자의 논문 34편이 발표되어 원효불교를 불교학·철학·역사학·문학·미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각도로 조명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통불교론은 원효 개인의 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론으로까지 확대해석되어 호국불교론과 함께 공동연구와 학술회의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학문 외적인 필요성에서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체제가 역설적으로 원효의 통불교론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통불교론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오염되거나 정체되었으며, 내용 없는 공허한 메아리만 난무하였다. 이기영이 학술회의에서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진지한 학문연구 풍토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효불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고익진에 의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과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시도되고, 은정희에 의해 두 저술에 대한 주석이 이루어진 것은 원효불교 연구의 토대를 구축하는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특히 고익진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체계를 7세기 동아시아 불교계의 공통적 관심사였던 중관·유식의 화쟁을 위한 논리적 근거로 해석한 것은 원효불교 이해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고익진의 주장은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과 반론이 제기되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이런 논란을 통해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이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에서 핵심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동시에 원효불교가 중국 화엄사상의 성립에 미친 영향에 대한 탐구가 본격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90년대 이후에는 원효불교 연구자의 증가와 함께 연구성과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원효의 행적에 관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검토되면서 거사불교가 새삼 주목받게 되었으며, 원효의 저술에 대한 검토에서도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에 국한되었던 연구에서 벗어나 원효 저술 전반에 대한 교감과 주석 작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 화엄사상과 보살행, 계율관과 정토관 등의 이해로 다양화되었다. 그리고 원효 저술이 동 아시아 불교에 미친 영향과 원효 불교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검토하는 단계로 발전되었다.

1910년대 근대불교학 성립 이래 100여년 동안 원효에 대한 연구 성과는 저술과 논문이 1000여편을 상회하게 되었는데, 한국학의 어떤 인물이나 주제에 비하여도 뒤지지 않을 분량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박사학위 논문이나 단행본들이 속속 출간됨으로서 한층  다양화되고 심화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양적인 축적에도 불구하고 원효의 생애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의 설화적인 이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원효의 저술이나 사상에 대한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이해는 여전히 미흡하다. 밀교를 제외한 대승불교 전분야에 대한 저술을 남긴 원효불교의 폭과 깊이를 고려할 때, 한두 편의 논문이나 저술로 사상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원효가 ‘열반경종요’에서 지자대사의 말을 인용하여 중국 남북조시대의 4종이나 5시교의 교판설로 경전의 뜻을 헤아리려는 것은 마치 소라로써 바닷물을 길어올리려는 격이며, 대롱으로써 하늘을 엿보려는 격에 비유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원효불교를 재조명하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일차적 목적은 역사로서 원효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것이지만, 이차적 목적은 현재 한국불교의 좌표를 정확하게 설정하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원효의 불교를 통불교·회통불교·화쟁불교·종합불교라고 성격을 규정할 때, 그러한 개념을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으로써 확대 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부터 검토해 보겠다. 앞에서 원효불교의 전승과정을 검토하여 본 결과 한국불교사에서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원효가 세상을 떠난지 100여년 뒤에 원효 현창 사업 일환으로 원효의 거사상과 ‘서당화상비’가 조성되었으며, 태현·견등·표원 등에 의해 원효의 ‘화엄경소’와 ‘대승기신론소’가 주목받았으나 뒤에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11세기 후반에 의천에 의해 원효불교가 재발견되어 화쟁국사로 추증되고 원효의 저술 44종이 간행되었으나, 의천 사후 곧 잊혀져 갔다. 12세기 이후 선종이 주류가 되고, 이어 15세기 이래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위축되는 가운데 원효불교는 한국불교사에서 완전하게 단절되었다. ‘화엄경’의 주석서로는 중국의 이통현과 징관, ‘대승기신론’의 주석서로는 역시 중국의 법장과 자선의 것이 텍스트로 채택됨으로써 원효의 주석서는 한국불교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7세기 이후는 태고법통설에 의해 원효는 산성(散聖)의 위치로 전락하고 설화상의 인물로 전승되었을 뿐이다. 원효가 다시 복권되고 원효저술이 수습되는 것은 일본 근대불교학의 불서 간행과 그 영향의 결과였다. 태고보우를 정통조사로, 그리고 임제종의 간화선을 종지로 하는 오늘날의 불교계에서도 원효불교는 역시 변방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원효의 통불교·종합불교를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타당성이 결여된 주장일 뿐임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1930년의 최남선과 1967년의 이기영에 의한 원효불교의 재발견은 한국불교의 역사상 정통 조사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둘째로 원효불교는 7세기 신라의 사회 변화와 정치 발전에 부응한 역사적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신라에는 원효와 동류의식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여 소외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화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특징은 작은 절이나 저잣거리를 무대로 하는 대중교화사이면서 동시에 불교사상이나 경전에 일가를 이룬 뛰어난 사상가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 영역과 역할을 구분하여 종교적 방법으로 지배체제의 정비와 삼국통일전쟁으로 회생된 피지배층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불안과 고뇌를 치유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앙귀족들이 주도하는 교단과는 거리를 두었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불교를 통한 사회 안정과 통합을 염원하는 새로운 지배세력의 요청에 부응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신라불교의 사회적 기반의 확대와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의 달성에 기여할 수 있었다. 

한편 1945년 해방된 이후 70여년간의 한국불교 현대사는 혼란과 격변의 연속이었다. 현대불교사에서 거사불교, 특히 재가불교단체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시기는 8.15해방 직후 3년간과 70~80년대의 10여년간이었다. 해방 직후는 일제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불교의 자주화를 위한 불교개혁을 추진하려는 것이었고, 70~80년대는 억압체제에 항거하여 민주화와 자주화를 위한 불교개혁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두 시기의 재가불교단체의 활동은 불교계 상황과 취지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당위성을 가진 불교운동이었다. 그러나 두 시기의 활동 모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시적인 유행으로 곧 사라져버린 미완의 개혁운동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여러 각도에서 검토가 요구되는 문제라고 보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서는 첫째로 뚜렷한 역사의식의 결여와 불교사상의 이해 부족, 둘째로 정치 영역과 구분되지 않고 지나치게 정치적 운동의 성격을 띠었던 점이었다. 물론 재가불자 모두 뛰어난 불교사상가일 수는 없지만, 불교연구와 실천수행을 병행하려는 노력이 요구되며, 또한 대중교화나 개혁운동의 내용과 방법에서 정치변혁운동이나 사회개혁운동과 구분되는 종교적인 입장과 방법을 견지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점에서 7세기 원효를 비롯한 일군의 교화사들의 불교사상과 대중화운동, 그리고 원효의 거사불교를 종교적 전범으로 삼은 이기영의 한국불교연구원에서의 불교연구와 신행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는 작게는 신라 불교계를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지만, 크게는 동아시아 불교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국제적인 성격의 불교로서 완성된 것이었다. 원효의 불교사상체계의 성립과정은 대개 3기로 구분될 수 있는데, 1기에는 구역불교를 통하여 불교사상 이해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2기는 현장에 의한 신역경전의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3기에는 ‘화엄경’의 유심사상과 보살도를 중심으로 한 차원 높은 통합적인 불교사상과 수행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원효의 이러한 사상체계 수립은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통합이라고 하는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불교사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불교, 특히 중국의 화엄사상 성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불교계는 출가자 감소라는 위기를 걱정하고 있으나, 더욱 근원적인 문제는 원효와 같은 뛰어난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또한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가 재가를 불문하고 무엇보다도 불교연구의 부진과 화석화된 간화선의 집착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서 이 시대의 선지식이 될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하고 이 시대에 부응하는 불교사상체계와 수행방법을 계발하는 일을 우선해야 할 것이며, 특히 종단에서는 전근대적인 종파의식이나 문중의식의 편협성, 화석화된 간화선의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서 원효불교까지 아우를 수 있는 종지와 종통의 확립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넷째로 거사로서 재가불교를 이끌던 원효에게는 평생의 도반이자 화엄종이라는 출가교단을 새로 창립한 의상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함께 중국 유학을 추진하였고, 장년 이후에는 화엄사상의 성립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였다. 두 사람은 재가와 출가로 길을 달리하여 원효는 거사로서 재가와 출가를 넘나드는 무애한 교화활동을 전개한 반면, 의상은 청정한 승려로서 교단 운영과 제자 양성으로 일관하는 교화활동을 전개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추구하는 대승불교 이상의 구현이라는 목표는 같은 것이었으며, 또한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과 노비층까지 전체 사회구성원을 대상으로 하여 평등과 조화, 화합과 평화를 실현하려는 취지도 다름이 없었다. 출가교단과 재가불교는 상호 평등한 관계이며, 상호 보완의 관계로서 출가교단은 평등과 화합의 이상적인 집단의 모델이 되어 청정한 바람을 세속사회에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재가불교는 세속사회에 직접 뛰어들어 청정한 바람으로 세속사회를 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59호 / 2022년 1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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