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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한계현일 스님의 시 세계 첫 조명

  • 교학
  • 입력 2022.12.09 21:22
  • 수정 2022.12.10 15:26
  • 호수 1661
  • 댓글 1

이종찬 동국대 국문과 명예교수
‘한계집’ 선시 185수 집중 분석
“백곡처능과 종풍 드날린 선승”

이수민의 ‘고승한담(高僧閑談)’, 18세기. [법보신문 DB]

조선후기 시인 한계현일 스님(寒溪玄一, 1630~1716)의 시 세계를 조명한 첫 논문이 나왔다. 한평생 불교 시가송(詩歌頌)에 천착한 원로학자 이종찬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동악어문학’ 제87집에 ‘한계집과 현일의 시세계’를 발표했다. 

이 교수는 논문 어귀에서 “시를 주고 받은 이들의 신분으로 보아 현일 스님은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고 사회에서도 인정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면서 “그럼에도 불승인명록인 ‘동사열전’이나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근현대 한국불교사전류에서는 스님의 법명을 찾아볼 수 없다. 한계현일에 관한 논의를 조금이라도 진전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글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분석한 건 현일 스님의 시 185수를 모은 ‘한국불교전서’ 제11책의 ‘한계집’이다. 현일 스님이 입적하고 3년 뒤인 숙종 45년(1719) 발행됐다. 현재 ‘한계집’은 한 권의 필사본만 남아 있는데 이를 소장했던 인물은 서문에서 스스로 ‘과객(過客)’이라고 밝힐 뿐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고 있다. 다만 현일 스님에 관해 “벽암 각성의 제자 가운데 유불도 삼교에 능통한 이는 백곡 처능과 ‘한계’뿐”이라고 적고 있다. 

발문은 조선후기 문인 함계(涵溪)가 썼다. 여기서도 역시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 수축에 공이 컸던 벽암각성에게 나아가 백곡과 함께 종풍을 드날렸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정보를 더 알 수 있는데 현일 스님의 속성이 충남 보령 황씨(黃氏)이며, 세수 87세에 입적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일 스님에 관해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보이기도 하다. 

다만 ‘한계집’에 실린 시와 스님이 교유한 인물들의 화답시를 통해 스님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현일 스님이 국가의 명으로 용문사 법회에 초청됐을 때 쓴 ‘용문사여이조명초도려기도’(龍門寺余以朝命招道侶祈禱)는 당시 현일 스님이 불교계 안팎으로 큰 영향력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불가의 덕 높으신 스님들께서(釋門⿓象客)
사방의 명산에서 오시었으니(來⾃四名山)
도의 크긴 불도징·구마라집 같고(道大如澄什)
재주 높긴 혜원·도안과 비슷하네(才⾼似遠安)
재 올릴 땐 부처님의 법제 따르며(修齋依佛制)
복 구함에 하느님이 내리길 원해(求福願天頒)
재앙·상서 이변을 한번 멸하여(一滅灾祥變)
일만 세월 즐겁기를 기약하누나(⻑期萬歲歡).
- ‘용문사여이조명초도려기도’

현일 스님은 백암성총, 월저도안, 무용수연 등 여러 스님들과 시를 주고 받았고 당대 내로라하는 사대부·재상들과도 스스럼 없이 교유했다.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이상진(1614~1690)은 현일 스님을 혜휴에 비유하고 있다.

시냇가의 바위를 사랑하기에(爲愛溪邊石)
손님 와도 누대에 안 올랐는데(客來不上樓) 
번잡한 회포를 씻기어 내고(煩襟⽅洒落)
혜휴 스님과 함께 노니네(又共惠休遊).
- 이상진이 차운한 시 中

남조(南朝) 송(宋)의 시승이었던 혜휴는 시문에 능해 세조의 명으로 환속한 뒤 양주종사(揚州從事)를 지낸 인물이다. 이 교수는 “역사적으로 중국은 물론 조선시대에도 유가의 선비가 뛰어난 재주를 지닌 스님을 만나면 이따금 환속을 권하는 일이 있었다”면서 “이상진이 혜휴를 연상했다는 건 환속을 은근히 권유할 만큼 현일 스님이 뛰어났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고 분석했다.

비단 폭에 그림 그리듯 써내려간 표현도 절묘하다. ‘황룡지(黃龍池)’에서 현일 스님은 ‘폭포’로 생겨난 연못을 순차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손바닥처럼 보이는 물을 수평으로 깔아 놓고 높은 누대를 수직으로 세운 뒤 이 공간 구도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물을 옥가루로, 물고기는 황금 북으로 표현한다. 여기에 물소리와 햇빛으로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하고 반쯤 피어 있는 두견화로 주변을 장식한다. 

바위 표면 손바닥처럼 평평하고(石面平如掌)
높은 누대 푸른 파도 베고 있는데(⾼臺枕碧波)
물결이 튀어 구슬가루 뿜어내고(浪跳噴玉沫)
물고기는 뛰며 황금 북을 던진다(⿂躍擲⾦梭).
폭포에 나는 우레 소리 웅장하고(瀑吼雷聲壯)
연못에 비치는 햇빛 화려하다(淵澄日暎華).
두견화도 반쯤 터져 피려하니(杜鵑花半綻)
아름다운 감흥이 석양에 넘친다(佳興夕陽多).
-‘황룡지’

시의 구성도 독특하다. ‘의침정구곡천(欹枕亭九曲川)’의 경우 “용이 왜 수정궁의 참다운 굴을 버리고 이 조그만 강가에 누웠느냐”는 질문으로 시문을 연다. ‘권농암(勸農岩)’에선 “왜 하필 바위 이름이 권농암이냐”며 대화를 시작하고, ‘석강명뢰(石矼鳴瀨)’에선 ‘자설(自說)’이란 표현으로 자신을 사물 진경(眞景)에 몰입시킨다. 이때 향봉의 푸른 학과 눈썹 같은 뭇 봉우리의 백옥 달은 현일 스님의 동반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탈속의 멋을 드러낸 선시다. ‘시평상일수(示平常一首)’에서 스님은 물 긷고 나무를 나르는 평범한 일상을 그리며 평상심시도(평상한 마음이 도)의 세계를 여실히 밝힌다. 성인과 범부를 나누는 건 ‘헛된 입’ ‘부질 없는 입방아’라고 빙판에 내려치는 도끼 같은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물 긷고 나무 나름이 바로 진리의 법신인데(運水搬柴卽法⾝)
누가 미혹·깨달음으로 성인 범부 나누었나? (誰將迷悟聖凡分)
사십구년 부처님 설법도 헛된 입을 연 것이니(四旬九載虛開口)
과거불 오십삼인도 부질없는 입방아이었다네(五⼗三人謾鼓脣).

까막까치 지저귐이 신묘한 진리의 이야기이고(鵲噪鴉啼談妙理)
봉숭아 붉고 오얏꽃 흰 것이 천연 진리 말씀(桃紅李白說天眞)
만약 이러한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若能深解如似旨)
봄빛은 사올 수 있다 해도 보배로는 못 쓰여(買得春光不用珍).
- ’
시평상일수’

그러면서도 나이 어린 초심자를 격려할 땐 한없이 겸손하고 다정했다. 

어려서 불문에 들어와 청정한 수업을 닦아(早入空門修淨業)
눈 자태 얼음 골격이 범상한 무리 뛰어넘어(雪姿氷⾻出凡曹)
자유로운 종적은 일천 물가 갈매기이고(⾃由蹤迹鷗千渚)
맑고 맑은 회포 품은 건 온 동산의 학일세(淸淨襟懷鶴九皐).
내 허연 수염에 참선의 멋없음 부끄럽고(愧我霜髭禪味薄)
그대 푸른 눈동자 진리의 정 높음 부러워(羨君⾭眼道情⾼)
그대 사랑의 무궁한 뜻을 알려고 한다면(欲知柏悅無窮意)
저 푸르고 넓은 바다 일만 이랑 물결 보라(看取滄溟萬頃濤). 
-‘증지헌사(贈志軒師)’

이 교수의 논문은 지금껏 중요도에 비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현일 스님의 사상을 다룬 첫 연구성과다. 그간 80여명의 시승과 선객을 조명해 신라·고려·조선의 선시 체계를 세운 그는 “불가 시문학에 현일 스님을 더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61호 / 2022년 1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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