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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虎溪三笑)의 경책

기자명 이병두

정치권력에 너무 가깝게 다가가서 혜택을 많이 보거나 종속되어 권력이 던져주는 당근 맛에 취해 있다가 그 권력의 몰락과 함께 큰 피해를 입거나 아예 역사에서 사라진 종교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계를 향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깝게도 멀게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상식이라고 할 당연한 말이지만 이 당연한 일이 잘 안 되는 게 현실 세계이다.

중국 동진시대의 혜원 스님은 여산 동림사에 은거할 때,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도연명과 육수정을 배웅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이 세속과의 경계로 여기고 있던 호계(虎溪)를 건너 버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고사로 유명하다. 스님은 막강한 권력자와 보통 사람들을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였으며, 환현(桓玄)‧노둔(盧遁) 등 군벌들에게도 굽히는 일 없이 의연하였다. 당시 막강 권력을 쥐고 있던 환현이 여산을 지나는 길에 스님에게 동림사와 세속 세계의 경계선인 호계에까지 나와 달라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자 절에까지 찾아와 스님과 문답을 나눈 뒤 산을 내려가면서 측근에게 “내 생애에 본 적이 없는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할 정도이다.

이 환현과 스님 사이에 오간 편지 논쟁을 묶은 책이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환현이 먼저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출가 사문이 왕에게 절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예경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물었지만 스님은 “출가 수행자는 세속을 초월하였으므로 임금 앞에서도 절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단호하게 펼쳤다. 환현은 스님의 논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왕권을 찬탈하여 천자로 등극하는 날에 결국 ‘사문도 왕에게 절을 하라’는 명령을 철회하였다.

‘불교계를 정화하겠다’는 환현에게 스님이 그 잘못을 지적하였으나, 402년에 환현이 이를 강행하며 ‘승려 도태(淘汰) 명령’을 내렸는데 스님이 이끄는 여산 교단은 정화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스님에 대한 신뢰의 표시였을 것이고, 그 뒤로 스님의 교단은 좌선‧염불‧간경에 더욱 힘쓰며 계행을 바르게 실천하고 출‧재가 불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염불결사를 결성하였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막강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 박정희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러 성철 스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자, “누구든 삼천 배를 해야 한다”며 거절 의사를 밝혔고 이를 전해 받은 대통령이 그대로 돌아갔다는 비슷한 일화가 전해진다.

1930년대에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해서 다져가던 시기에 독일 주재 바티칸 대사였던 파첼리(Pacelli)는 훗날 교왕이 되어 ‘히틀러의 교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나치 정권 수립과정에서부터 히틀러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인물이다. 독일 정계에서 중요한 지분을 갖고 있던 독일 천주교계가 히틀러에게 저항을 포기하여 결국 나치 독재를 강화시켜가게 된 배경에는 파첼리의 설득도 있었지만, 1935~36년 내내 천주교 성직자들이 고아원과 학생들을 상대로 저지른 성적 학대와 해외 선교‧공동체 운영 과정에서 자행된 금융 비리를 언론에 흘리거나 경찰에 고발하는 방식의 ‘당근과 채찍’ 전략이 주효한 점도 중요하다. 이것은 히틀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권력이 쓰는 수법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와 순수하게 관계를 이어온 ‘착한 정치권력’이 있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력은 언제 어디에서나 종교를 이용(또는 활용‧악용)하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 당하지 않을 책임은 오로지 종교 쪽에서 져야 할 몫이다. 추운 겨울 절에 온 이승만에게 주지스님이 땅바닥에 엎드려 3배를 하던 시절에 비하면,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과 종정‧총무원장 취임법회 등 주요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게 된 상황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만 이런 일에 취하지 말고 정치권과 적정선을 지켜야 한다. 호계삼소(虎溪三笑)는 단순한 고사가 아니고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경책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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