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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삶

기자명 진원 스님

우주 질서 속에 있는 우리 생명체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보면 분명 시작과 종말이 있다. 사대육신이 인연이 화합하여 이루어져 있다가 사대가 흩어지는 과정을 우리는 시작과 끝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시무종의 시공 속 사대가 흩어지는 과정에서 마지막 원자만 남았을 때 이 원자는 우주의 어느 곳에서 어느 인연과 화합할지는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전우주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에서의 시제는 어떨까.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시제가 기찻길처럼 일직선에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원형을 이루고 돌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이라고 할 것도 없고, 어디까지가 끝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시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23년 아침 해는 아무 일 없이 떠올랐고, 삶도 그저 그런 날들이 될 것이다.

시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지관은 매년 종무식과 시무식을 한다. 복지관의 시무사는 기관의 철학과 미션을 바로 세우고 한해의 모토를 세우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2023년 기관의 모토는 ‘심사고거(深思高擧)’, 생각은 깊게 하고 행동은 대담하라는 뜻으로 했다. 어쩌면 토끼가 상징하는 것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말이기도 하다. 즉 말보다는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올해는 검은 토끼의 해라고 한다. 토끼는 12지신의 동물들 중에 가장 귀엽고 여린 동물에 속한다. “놀란 토끼눈”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처럼 관용구로 쓰이는 말도 있고 부정적인 사자성어도 있다. ‘놀란 토끼’처럼 자주 놀라는 겁쟁이 동물이기도 하지만, 장점은 귀가 매우 커서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가 미약 할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점에 비한다면 ‘심사고거’가 토끼 귀처럼 내면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를 잘 들어서 조심조심 소통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성찰의 소리와 밖의 예민한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토끼의 귀처럼 중생들의 소리까지 잘 들어주고 주저하지 말고 이타행은 과감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가 하면 주지소임은 한 해가 바뀌는 정초가 가장 바쁘다. 사람들은 새로운 일년에 대한 길흉화복을 매우 궁금하게 여긴다. 결코 길흉화복을 궁금해 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은 아니다. 복을 비는 것 또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과거시제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한다. 긴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좋은 일도 많이 만나고, 고통스러운 삶도 만나는 여정이다. 우리는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좋은 일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고단한 삶에 대해서는 마치 트라우마처럼 각인이 된 듯하다. 그래서 자업자득의 운명을 자꾸 제3의 기운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정초에는 신중기도를 시작으로 많은 산림불사들이 이루어진다. 신중기도는 상계욕색계의 천신들과 중계의 팔부신장님들, 하계에 우리와 눈높이가 같고,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산신 토지신 하물며 우리 부엌에 조왕신에게까지 일년동안 무탈하게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다. 비록 타력신앙이지만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타력신앙 안에 반드시 자력 수행의 힘을 보태야만, 태양은 그저 무심히 떠오를 수 있고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날들은 지속될 것이다. 무탈한 날을 기독교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하고, 불교에서는 “오유지족”이라고 한다. 그저 아주 평범한 그날이 그날 같은 날에 축복과 감사가 있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시제(지금)에 감사하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올해의 좋은 일은 무엇이고 나쁜 일은 무엇이고, 좋은날은 어떤 날이고 나쁜 날은 어느 날인가? 이런 날들과 특별한 일들이 따로 있지는 않다. 

그 평범한 날 속에 주체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한 구절의 말씀이라고 듣고 기뻐한다면 전 우주에 가득 찬 보배를 얻는 것보다 낫다. 한 구절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지혜를 이끌어 내며 보살행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다.”(‘유교경’)

진원 스님 계룡시종합사회복지관장 suok320@daum.net

[1665호 / 2023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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