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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면옥

어릴 때 먹었던 음식 맛이 엄마를 부른다면, 다 커서 만난 음식도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보다. 나에게 평양냉면은 바로 그런 음식이다. 비빔은 정중히 사양한다. 사시사철 언제나 물냉면을 먹는다. 성격 한번 유별나다. 특별한 맛이랄 것도 없는 슴슴한 국물과 맥없이 끊어지는면발의 허무한 느낌이 내 마음을 사로잡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을지면옥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얼추 25년은 된 것 같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시간을 두고 한없이 불안하던 시절, 추운 겨울날 우연히 들렀던 곳이 을지면옥이었다. 처음 맛본 차가운 냉면 육수가 주눅 들어 있던 내 가슴을 뻥 뚫어 주는 것만 같았다. 만해가 노래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이런 맛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날 나는 평양냉면이 처음부터 맛있다고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전까지 나의 옛사랑 음식은 잔치국수였다. 무엇보다도 먹는 방법이 간단했다. 숟가락 대신 젓가락 하나면 충분하다. 후루룩 서너 번과 국물 두어 모금 마시면 끝이었다. 음식은 먹는 그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비겁하지 않았지만 야무지지도 못했다. 손해를 보는 것은 항상 나였다. 그동안 냉콩국수는 먹어봤지만, 평양냉면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사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새로운 사랑을 만난 감정과도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날따라 을지면옥의 냉면 맛이 왜 그렇게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는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뒤로 혼자서도 자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을지면옥은 나의 요즘 사랑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을지면옥의 냉면 맛은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당기는 살가운 맛이었다. 하긴 곰삭은 냉기를 품은 동치미 육수가 내 입에 딱 맞긴 했다.

을지면옥은 동굴을 들어가는 듯한 허름한 입구와 낡은 식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절하지 않았던 중장년 여성들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식당이기도 하다. 그러나 뭐라고 해야 할까, 잠시 스쳐 지나갔던 사람이 뜬금없이 자꾸 생각나는 그런 묘한 기분이 드는 음식 맛이 좋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낯선 사랑이 어느새 익숙한 사랑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을지면옥이 작년 봄과 여름 사이에 정말 감쪽같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군대 간 남자친구에게 갑자기 소식을 끊은 그 여자보다 더 원망스러운 심정이었다. 음식은 소중한 기억의 중요한 일부다. 추억의 장소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멸한 것은 그리움 하나를 강제로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무조건 아침저녁으로 지나쳤던 을지면옥 앞 인도가 낯설게 느껴졌다. 공사 가림막 너머 어디엔가 을지면옥은 그냥 그대로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을지면옥이 있던 자리 주변에는 육중한 몸집의 복합상가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몇 군데 남지 않은 기존의 공구상들이 한없이 초라하게 보인다. 마음이 아팠다. 문득 나이든 내 모습도 되돌아보게 되고. 언제나 거기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던 사람과 장소가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것은 참 서러운 일이다. 일 년에 두어 번 명절 제사상에서나 만나 뵙는 부모님의 옛 모습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럴 때 무상의 가르침은 시간의 무게를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나지막하게 일깨워준다. 날마다 팔정도 불상 앞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삼배 대신 일배라도 올려야 마음이 편해진다.

음식은 그리움이고, 추억은 다시 아픔이 된다. 영원하지 않아서 세상은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말로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해 본다. 을지면옥의 퇴장은 재개발의 논리에 밀려 원주민들이 도심 밖으로 쫓겨나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어 더욱 씁쓸하다. 그렇다고 넋 놓고 안타까워할 수만도 없다. 붓다가 영원 대신 무상임을 일깨워 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혼잣말을 수도 없이 중얼거린 하루였다. 명절을 앞두고 온갖 상념이 떠올라 마음이 허전해졌던가 보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66호 / 2023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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