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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6)(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 (2) ② 의상의 전기자료

화엄교학 주류 이뤘으나 의상 스님 전기·저술 온전히 전승되지 못해

원래 자료로는 ‘부석존자전’과 ‘부석본비’가 있었으나 사라져 현존자료는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와 ‘송고승전’ 의상전 남아일본은 나라시대에 의상전기 전승…그림으로 ‘화엄조사회전’

범어사 소장 ‘삼국유사’.
범어사 소장 ‘삼국유사’.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조 부분. [법보신문 DB]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조 부분. [법보신문 DB]

의상(625~702)은 원효(617~686)와 함께 신라중대의 새로운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그들에 관한 전기 자료는 의외로 많지 않아 자세한 행적을 밝히기가 극히 어렵게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효는 재가불자로서 승속을 넘나드는 무애한 교화 활동을 전개하면서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거나 교단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 그의 불교는 제대로 전승될 수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전기 자료와 함께 저술들도 온전히 전승되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상은 근엄 성실한 수행자로서 화엄교학을 열심히 유포하면서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여 커다란 교단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후 화엄교학과 화엄종은 줄곧 한국불교사에서의 교학과 교단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기 자료와 함께 저술들이 온전히 전승되지 못한 점은 불가사의한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의상과 원효에 관한 전기 자료의 부족은 한국불교 전통의 계승과 발전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불교사학 분야에 첫 번째로 부닥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하였다. 근대 이후 불교사학계에서 원효의 불교사상과 함께 의상의 화엄종은 크게 주목받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적지 않은 성과들이 축적되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행적에 대한 이해조차도 아직 설화적인 수준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의상의 전기자료로는 원래 최치원(857~?)이 찬술한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그리고 부석사에 수립되었던 의상의 탑비로 추정되는 ‘부석본비(浮石本碑)’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균여, 의천, 각훈, 일연, 체원 등이 이들 자료의 일부를 참조하거나 인용했었고, 13세기경에는 일본 불교계에도 알려졌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에는 유통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전에 이미 단절되었던 것 같다. 의상의 전기 자료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는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와 ‘송고승전’의 ‘의상전’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 ‘의상전교’조에서는 의상의 출생과 출가, 입당과 지엄 문하에서의 수업, 귀국의 동기, 부석사 창건, 법장이 보내온 서신, 전교 10찰과 10대 제자, 황복사에서의 이적 등 비교적 다양한 행적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일연은 의상 전기의 온전한 내용은 ‘최후본전’(최치원의 ‘부석존자전’)에 미루고, 자세하게 서술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의상전교’조는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고, 또한 고려후기까지 전해지던 ‘향전(鄕傳)’ 등의 전승기록 등을 참조해서 작성된 가장 종합적인 의상의 전기 자료로 평가된다. 온전한 의상의 전기 자료로는 ‘송고승전’의 ‘의상전’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의상의 출생과 출가, 입당과 지엄 문하에서의 수학, 전법사찰의 창건과 국왕과의 관계, 제자 양성과 수행자로서의 면모 등을 시기순으로 서술하였다. ‘의상전’ 의 내용은 ‘의상전교’조의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이한 점도 없지 않아서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

그런데 ‘의상전교’조에서 없는 내용으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원효의 토굴에서의 깨달음의 설화와 선묘라는 여인과 관련된 세 단락의 설화 등이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설화 내용은 후대에 구성된 것으로 의상의 행적과 직접 관련된 사실은 아니지만, 후대에서의 의상 불교 평가의 자료로서 참고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의상전교’조 이외에도 여러 항목에서 의상의 행적에 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즉 ‘문무왕법민’ ‘동경흥륜사금당십성’ ‘전후소장사리’ ‘낙산이대성’ ‘승전촉루’ ‘낭지승운’ ‘진정사효선쌍미’ 등의 항목에서 비록 단편적인 내용들이지만, 의상의 행적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들 기록은 단편적으로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상호 모순되는 내용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의상 불교의 영향의 폭이 그만큼 넓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사료로서의 성격과 의미를 밝히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삼국유사’의 여러 항목에 기록된 의상의 행적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문무왕법민’조에서는 의상이 당 유학 중 문무왕 10년(670) 김인문(사실은 김흠순)으로부터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듣고 급거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알려 대비케 하였고, 문무왕 21년(681) 문무왕의 축성 공사 중지를 건의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특히 축성 중지를 건의한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어서 의상과 문무왕의 관계를 주목하게 하는 내용이다. ‘동경흥륜사금당십성’조에서는 신라 10성 가운데 의상과 표훈이 포함되어 8세기 중반 이후 의상의 법손들이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였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삼국유사’에서의 의상 관련 자료로서 특히 주목되는 항목은 ‘전후소장사리’조의 기록이다. 여기에서는 ‘부석본비’에 의거하여 “의상이 무덕 8년(625)에 출생하고 관세(丱歲,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영휘 원년 경술(650)에 원효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고구려까지 이르렀으나 장애가 있어 돌아왔으며, 용삭 원년 신유(661)에 당으로 들어가서 지엄에게 배웠다. 지엄이 세상을 떠나자 함형 2년(671)에 신라에 돌아와서 장안 2년 임인(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8세였다”고 하여 의상의 생애를 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 기록은 ‘부석본비’의 내용을 축약하여 출생부터 입적에 이르는 중요한 사실의 연대만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지만, 의상의 다른 전기 자료에 비하여 신빙성이 대단히 높은 내용이다. 그런데 고려말기까지 최치원의 ‘부석존자전’과 함께 기본적인자료로 활용되었던 ‘부석본비’는 일찍이망실되어 버림으로써 의상의 탑비로 추정될 뿐이고, 비문의 찬자와 시기를 확인할 길도 없게 되었다.

다음 ‘낙산이대성’조는 의상의 관음신앙을 알려주는 자료인데, 의상의 사후의 저술로 의심받는 ‘백화도량발원문’과 함께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승전촉루’조에는 당 법장이 귀국하는 승전을 통해 의상에게 보내온 서신의 별폭(別幅)이 실려 있어서 법장이 보내온 저술들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법장의 서간 본문이 실려 있는 ‘의상전교’조의 내용을 보완해 준다. ‘낭지승운’조에는 의상의 제자인 지통의 행적이 실려 있으며, ‘진정사효선쌍미’조에는 진정이 의상의 제자가 되는 연유, 그리고 돌아간 진정의 모친을 위해 소백산 추동에서 3,000명의 문도들에게 ‘화엄대전’을 강의하고 그 요지를 정리한 ‘추동기’를 편찬하였다는 경위를 싣고 있는데, 의상의 교단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한편 의천(1055~1101)의 ‘신편제종교장총록’은 ‘부석본비’를 수록하지 않은 반면, ‘부석존자전’은 같은 최치원 찬술의 ‘법장화상전’과 함께 열거하고 있다. ‘부석존자전’은 일연의 ‘삼국유사’ 이외에도 여러 자료에서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 균여(923~973)의 ‘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을 인용하여 의상이 ‘법계도시(法界圖詩)’를 짓게 되는 연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 설화의 요지는 의상이 신인(神人)의 청탁을 받고 스승 지엄과 거듭 상의하면서 내용을 수정하여 ‘법계도’를 완성하였다는 내용인데, 균여가 ‘법계도’의 저술자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의상의 친저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학계에서는 의상의 친저임을 의심하는 학자는 없지만, 최근 중국 ‘방산석경'에서 지엄의 찬술로 각인된 ‘일승법계도합시’ 가 발견되면서 외국학자들에 의해 저술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었다.

11세기 후반 박인량(?∼1096)이 지은 ‘해동화엄시조부석존자찬’은 ‘송고승전’ 의상전의 선묘설화를 소재로 삼은 내용이지만, ‘법계도’ 찬술의 연기는 역시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인용한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의 내용을 따르고 있음이 확인된다. 고려 고종 2년(1215)에 각훈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은 현재 2권만이 남아 있어서 ‘의상전’을 확인할 수 없지만, ‘안함전’에서 안함(安含)과 안홍(安弘)이 동일인지의 여부를 논하는 가운데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이 인용되어 있다.그 인용 내용은 의상이 태어난 진평왕 건복 42년(625)년에 안홍이 당에서 귀국하였다는 간단한 사실뿐이지만, ‘부석존자전’이 고려후기에 읽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사례이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 체원의 ‘백화도량발원문약해’는 관음에의 진지한 구도 의지를 피력한 의상의 발원문을 주해한 것인데, 그 책 첫머리에 수록된 의상의 약전에서 의상의 자세한 행적은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에 미루고 있다. 그런데 체원의 언급에서 새로 확인되는 사실은 지엄으로부터 의상에게는 의지(義持),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법호가 주어졌다는 것인데, 이를 근거로 하여 의상은 실천수행자, 법장은 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던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의상의 전기에 관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본 결과 고려시대의 자료들에서는 대체적으로 최치원의 ‘부석존자전’ 그리고 ‘부석본비’가 근거 자료로 전승되는 가운데, 특히 ‘부석존자전’이 주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그것을 각 자료 편찬자의 관심 내용에 따라 초록하거나 축약시킨 전기로 만들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에서는 의상 전기의 자세한 내용을 ‘부석존자전’에 있다고 미루고, ‘향전’ 등 민간에 전승되던 자료에 의거하여 ‘부석존자전’에 있지 않은 행적을 위주로 엮음으로써 의상에 대한 다른 내용의 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최치원의 ‘부석존자전’은 전해지지 못하고,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의 내용이 주로 전승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조선 숙종 23년(1697)에 간행된 ‘지리산화엄사사적’에서는 의상의 전교 부분에 ‘의상전교’조의 내용만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면서 화엄사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1894년 각안이 편찬한 ‘동사열전’에서도 역시 ‘의상전교’조의 내용을 축약시켜 옮겼다.

한편 의상의 전기는 화엄종의 조사로서 중국이나 일본에도 전해졌는데, 특히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의거하여 지엄의 제자였음이 강조되었다. 중국에서는 ‘송고승전’에 ‘의상전’으로 입전된 이래 원대와 청대의 승전류에서 자주 의상의 전기가 입전되었다. 예를 들면 원대 1366년의 ‘신수과분육학승전’에서 의상의 전기를입적시키면서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의거하여 원효의 깨달음과 선묘의 설화만을 집중적으로 전재하였다. 일본에서는의상의 전기가 나라시대부터 전승되고있었는데, 특히 가마쿠라시대 고잔지(高山寺) 묘에(明惠,1173~1232)에 의해 ‘송고승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엄조사회전’을 만들고 있었으며, 조금 늦게 도다이지(東大寺) 교넨(凝然,1240~1321)의 ‘화엄법계의경’에서는 의상이 지엄에게화엄을 배웠던 사실을 특필하고, 이어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서 거명된 4명의제자들을 열거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66호 / 2023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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