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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수행이론의 총망라(40)-증입 관련; 총론⑤

성품에 본래 10가지 선업 갖춰져

대승의 5부로 불리는 경전들은
작은 이야기들 큰 경전에 편입
경전들 모순 없이 해석하는 건
전모 담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

뒷날의 문헌학자들은 인도의 세친 스님이 쓴 ‘십지경론’의 존재를 통해, ‘십지경’이 독립적으로 유행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승의 5부로 불리는 ‘화엄부’ ‘방등부’ ‘법화부’ ‘열반부’ ‘반야부’ 등 방대한 경전들은 원래, 작은 분량의 이야기들이 먼저 유행되다가, 훗날 대승 경전 작가에 의해 큰 분량의 경전 속으로 편집되어 들어간다. 

그런데, 경전 구성작가 제아무리 솜씨가 좋다고 해도, 그 많은 이야기를 모순 없이 엮어가는 건 쉽지 않다. 게다가 방대한 대승 경전 사이를 모순 없이 정합적으로 해석한다는 건 더욱 쉽지 않다. 그것은 결국 뒷날 ‘해석자’의 몫이 되었다. 높은 데 올라, 멀리 보는 시력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전모를 담아내는 안목을 갖추어야만 한다. 소위 ‘조망(照望)’해야만 한다.

이렇게 수많은 경전을 ‘조망’하면서 해석하는 전문 승려를 ‘의해승(義解僧)’이라 부르고, 그들의 학문을 ‘경학(經學)’이라 한다. 의해승들에 의한 경학에는 일정한 경향성을 띠게 되는데, 인도불교의 역사에서는 그 경향성을 ‘부파(部波)’별로 정리했고, 중국불교의 역사에서는 그 경향성을 ‘종파(宗派)’별로 정리한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가지만, 중국불교 연구자로서 한마디 보태야 하겠다. 중국불교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도불교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의 학승들이 인도 학승들의 이론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한국불교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불교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라나 조선의 학승들은 중국 학승들의 이론을 자신의 학문에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필자는 ‘어느 정도’라고 애매하게 표현했지만, 아는 정도가 깊고 넓을수록 훌륭한 연구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인도, 중국, 한국을 통틀어 어느 지역의 불교를 연구하던, 그 지역의 고유사상을 알아두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브라만교’와 ‘6파 철학’, 중국의 유교와 도교, 한국의 고유한 사상, 이런 등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 경학자는 이런 사전(事前)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지난 시대를 설명하여,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실존적 삶 말이다. 역사에 남는 경학가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화엄경’ 경학의 역사에서 한국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청량 징관 국사이다. 국사는 ‘십지품’의 본문을 열 부분으로 쪼개어 해석하고, 그중에서도 일곱째 즉, ⑦설분(說分)에서 수행의 지위 관련 열 단계[地]를 해석하고 있다. 첫 단계는 ‘환희지’ 즉, 세속의 삶을 뒤로 하고 마침내 ‘수행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지위[見道位]’이다.

그다음 단계는 수행이다. 초기 불교의 수행 방법 분류법은 다양한데, ‘십지품’에서는 그 중 ‘3학(學)’의 방법으로 정리한다. ‘이구지’에서는 ‘계학’이 근간이 된다. ‘왜 떠날 리(離)’ ‘때 구(離)’라 했는가? 범부(凡夫)의 세계에서 묻었던 때를 떨쳐버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구지’에서의 수행은 ‘때 빼기’이다. 때를 빼는 데에는 계율만큼 효과적인 수행이 없단다. 어떻게 계를 실천하는지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에서 인용한다.

“①성품이 저절로 일체 살생을 멀리 여의어서, 칼이나 작대기를 두지 아니하고, 원한을 품지 아니하고, 부끄럽고 수줍음이 있어 인자하고 용서함이 구족하며, 일체중생으로 생명 있는 자에게는 항상 이익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나니, 보살이 오히려 나쁜 마음으로 중생을 시끄럽게 하지도 않거늘, 하물며 남에게 중생이란 생각을 내면서, 짐짓 거치른 마음[重意]으로 살해를 하겠습니까.” 이어서 “②훔치지 않나니” “③사음하지 않나니” “④거짓말을 하지 않나니” “⑤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나니” “⑥나쁜 말[惡口]을 하지 않나니” “⑦번드르르한 말[綺語]을 하지 않나니” “⑧탐내지 않나니” “⑨성내지 아니하나니” “⑩삿된 소견이 없나니” 이렇게 보살의 길을 가려는 수행자의 ‘10선업(善業)의 길’을 소개하고 있다. 끝으로  이 대목의 독서 포인트는 인간의 ‘성품에 본래[性自]’ 이런 열 가지 선업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67호 / 2023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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