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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8)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4)

선묘설화는 신라말 부석사 창건 설화로 성립돼 송고승전에 채록

‘순수한 사랑의 불심으로 승화’는 의상 청정한 이미지 형성
유학 행로는 삼국유사·송고승전 다르지만 삼국유사 더 타당
당 도착해 장안·근교 불교계 살펴본 뒤 종남산 선택했을 것

의상 스님을 사모해 단월이 됐던 선묘의 설화를 일본 가마쿠라시대 묘에 스님이 그림으로 엮은 ‘화엄종조사회전’.
의상 스님을 사모해 단월이 됐던 선묘의 설화를 일본 가마쿠라시대 묘에 스님이 그림으로 엮은 ‘화엄종조사회전’.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의상(625∼702)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비교적 다양하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자료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많이 발견되고,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의상의 행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자료를 적당히 취사하여 대체적인 이해체계를 설정하는 작업만을 안이하게 반복하여 오고 있을 뿐이고, 자료 자체의 엄격한 비판과 사실의 본질적인 검토에서 출발한 학문적 성과는 찾기 어렵다. 예를 들면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이후 동해안의 바위굴을 찾아가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설화의 내용과 의미를 제대로 검토한 연구성과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의상이 이때 지었다는 발원문에 대한 문헌학적인 검토를 통하여 의상이 직접 지은 것일 수 없고, 후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의상의 낙산사 관음보살신앙의 문제는 자장의 오대산 문수보살신앙의 문제와 함께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의상의 불교신앙에서 관음신앙의 의미는 자장의 불교신앙에서의 문수신앙과 함께 결코 가볍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뒤에 의상의 불교사상과 신앙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겠으나, 굳이 이러한 문제점을 먼저 지적하는 의도는 오늘날 우리 학계에서의 불교사 연구의 자세와 이해방법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촉구할 필요성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선 의상의 당에 유학하는 과정에 대한 자료부터 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먼저 의상의 당 유학 동기에 대해서는 ‘송고승전’의 의상전과 원효전을 통해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의상전에서는,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당에서 교종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떠났다”고 서술하였고, 원효전에서는 “일찍이 의상법사와 당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현장 삼장과 자은의 문하를 흠모하였는데, 인연이 어그러져 마음을 그치고 돌아갔다”고 하여 의상의 당 유학 동기는 현장에 의한 경전 번역의 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보려는 의도에서 원효와 함께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현장의 번역 소식을 듣고 신역경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을 보아 이들은 이미 신라에 전해져왔던 구역경전을 폭넓게 섭렵하였고, 그 바탕 위에 당 불교계에서의 신·구역경전의 갈등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찾아갈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의상은 ‘부석본비’의 내용과 같이 1차로 진덕여왕 4년(650) 원효와 함께 육로로 출발하였으나 고구려에 막혀 실패하였고, 2차로 문무왕 원년(661) 해로를 통하여 당에 들어갔던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의상이 2차 유학에서 성공하는 37세 이전의 행적이 일체 알려진 것이 없다는 점이다. 이 기간에 그의 도반인 원효는 구역경전의 이해를 바탕으로 신역경전을 새롭게 섭렵하면서 이미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점을 고려할 때 의상도 이러한 원효의 영향을 상당히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유식학 분야도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의상의 행적이나 불교사상에서 신역불교나 유식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2차 도당 유학길에도 원효와 동행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원효는 도당 유학의 길에서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달음으로써 당 유학을 단념하고 귀환하였다는 설화를 남겼는데, 이 설화를 전해주는 ‘송고승전’에서는 공교롭게도 원효전이 아니고 의상전에만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오늘날 학계 일각에서는 661년 의상의 도당 유학과 원효의 오도체험을 별개의 사실로 이해하려는 주장도 없지 않으나, ‘송고승전’의 저자는 양자를 관련된 사실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의상전에서만 함께 묶어서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각도에서 원효의 저술 편년과 종합적인 불교 사상체계의 수립과정에 대한 이해를 추구할 때도 의상과 동반한 유학의 길에서 깨달음을 체험했다는 해석에는 별다른 모순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설화를 통해서 원효가 깨달음을 체험하고 귀환한 행적과는 대조적으로 의상은 초지일관 도당 유학의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행적도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추측컨대 원효는 신·구 경전을 폭넓게 섭렵하면서 구역불교와 신역불교 사이의 갈등, 그리고 인도 대승불교 이래의 중관학과 유식학 사이의 공·유 논쟁 등 당대 불교계의 문제를 ‘대승기신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확신에서 유학 도중에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닫고, 그 경지를 ‘대승기신론’의 문구를 빌려서 표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본다. 반면 의상은 구역불교, 특히 지론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현장에 의한 신역불교, 특히 유식학을 새로 접하면서, 신역불교 이후의 당 불교계의 동향을 주목하였고, 그러한 새로운 불교를 찾아보려는 욕구가 초지일관 당 유학을 관철케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의상은 당에 도착하자 장안 불교계에서의 현장의 위세와 영향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종남산(終南山)을 찾아가서 지론종의 지상사(至相寺)를 찾았고, 나아가 새롭게 화엄종을 일으키고 있던 지엄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던 것으로 본다.

한편 의상의 도당 유학의 행로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와 ‘송고승전’에서 전연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는, “영휘(650∼655) 초에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방으로 돌아가는 배에 편승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이 청하여 관아 안에 머물게 하고 공양을 지극히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종남산 지상사로 찾아가서 지엄을 배알하였다.”고 하여 당 사신의 배에 편승하여 당에 갔고, 양주를 거쳐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을 만난 것으로 서술하였다. 반면 ‘송고승전’에서는, “총장 2년(669)에 상선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다. 걸식하여 어떤 신도의 집에 머물렀다. (善妙와의 인연 사실은 생략) 의상은 장안 종남산의 지엄삼장이 머무는 곳에 곧장 가서 ‘화엄경’을 익혔다.”고 하여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도착하였고, 다시 종남산의 지엄을 찾아간 것으로 서술하였다. 그런데 두 자료 모두 도당 연대에 대해서는 영휘 초년과 총장 2년으로 다르게 기록하였으나, 역시 문무왕 원년(661)으로 기록한 ‘부석본비’의 내용이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의상의 행로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타당성이 더 높은 것으로 본다. 당시 당과 신라 사이의 일반적인 항로는 대중국 교통상의 관문인 당항성(黨項城, 현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소재)을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다가 황해도 연안에서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당시는 萊州의 文登縣)로 직행하는 노선이었으며, 고려 전기까지도 주요 노선이었다. 그런데 9세기 이후에는 남방 항로가 개척되어 영파(寧波)에 상륙하여 대운하를 이용하기도 하였고, 또한 더 남쪽의 천주(泉州)로의 항로도 열렸다. 따라서 양주를 경유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9세기 남방항로가 개척된 이후의 사정이 반영된 결과로 본다.

그런데 ‘송고승전’ 의상전에는 선묘(善妙)라는 여인과의 인연에 관한 설화가 상당히 많은 분량을 점하고 있어 약간의 검토가 필요하다. 같은 ‘송고승전’의 원효전에서 ‘금강삼매경론’의 저술에 얽힌 연기설화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던 사실과 함께 주목되는 점이다. 선묘는 의상의 행적 가운데 3차례 등장하는데, 첫째는 의상이 처음 등주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집의 소녀인 선묘가 의상에게 품었던 연모의 정을 마침내는 불심으로 승화시켰다는 내용이고, 둘째는 10여년 뒤에 의상이 귀국할 때에 선묘가 해룡(海龍)으로 변신하여 해로를 무사히 건너오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셋째는 부석사를 창건할 때에 선묘룡이 큰 암석으로 변신하여 사찰 창건을 방해하던 무리들을 쫒아버렸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부석사에는 선묘와 관련된 유적으로 석룡(石龍)·부석(浮石)·선묘녀상(善妙女像) 등이 전하고 있는데, 신라말기 부석사 창건의 연기설화로 성립되어 ‘송고승전’에 채록된 것으로 보인다. 여인의 순수한 사랑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사찰의 호법신이 되었다는 설화는 근엄 성실한 수행자로 일관한 의상의 청정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기여함으로써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출가교단과 세속사회를 넘나드는 교화활동을 전개하였던 원효의 무애한 이미지와 대비되어 즐겨 전승되었을 것이다. 일본불교사에서는 가마꾸라(鎌倉)시대 화엄종의 묘에(明惠)가 ‘송고승전’의 선묘설화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표현하였는데(華嚴緣起繪卷), 오랜 전란으로 미망인이 된 여성들이 위안을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편 의상이 당의 수도인 장안의 근교에 위치한 종남산에 도착한 시기는 신라를 출발한 다음해인 문무왕 2년(662)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찬술한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에서, “용삭2년(662)에 종남산 지상사에 나아가서 지엄화상을 스승으로 삼고 법장화상을 도반(益友)으로 삼았다”라고 한 기록을 참고할 때, 의상은 당에 도착하여 장안과 근교의 불교계 상황을 널리 살펴본 뒤에 종남산을 선택하였던 것 같다. 종남산은 장안 서남쪽의 진산인데, 신라 경주의 남산에 견주어지는 명승지였다. 특히 6∼7세기에는 불교와 도교의 성지로서 수많은 승려와 도사들의 은거지로 유명하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도성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국가권력에의 접근 기회를 잡으려는 인물도 없지 않았다. 수·당대에는 여러 불교종파의 영지가 되었는데, 삼계교의 신행(信行,540∼594), 정토교의 선도(善導,613∼681), 남산율종의 도선((道宣,596∼667), 지론종의 정연(淵,544∼611)과 지정(智正,559∼639), 화엄종의 두순(杜順,557∼640)과 지엄(智儼,602∼668)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삼계교의 신행은 개조로서 말법시대의 중생 구제를 기도하였는데, 그와 그의 제자들의 유해가 종남산의 백탑사(百塔寺에 안치됨으로써 삼계교의 성지가 되었으며, 정토교의 선도는 종남산의 오진사(悟眞寺)에 주석하여 정토왕생의 법을 유포하면서 민중을 교화하였다. 그리고 남산율종의 도선은 일찍이 624년 종남산에 들어와 강설과 저술에 종사하였고, 뒤에 계율의 다른 전적을 구하여 상부종(相部宗)의 개조인 법려(法礪)를 찾아가기도 하였으나, 642년에 다시 종남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장의 번역팀에 초청받아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의상이 종남산에 머물 때에 특히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런데 의상의 종남산에서의 화엄종 전수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지상사를 창건한 정연과 그 제자인 지정, 그리고 의상에게 직접을 화엄학을 전수해준 지엄과 그의 스승인 두순 등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데 종남산은 신라 승려들에도 일찍부터 알려졌는데, ‘속고승전’ 자장전에 의하면, 자장은 의상에 앞서 638년 장안에 갔는데, 한때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절벽 위에 거처를 마련하고 3년간 머물면서 홍진에 전염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고 하며, 특히 종남산의 원향(圓香)선사로부터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을 권유받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70호 / 2023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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