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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9)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5)

지정의 지론학이 그 제자인 지엄 거쳐 의상에게 전승 가능성 높아

의상불교는 지엄의 전수에서 출발해 화엄교학으로 일관
화엄교학은 지론종·섭론종 수용과 유식학 자극으로 성립
의상이 지상사에 머무를 때 지정의 저술들 전해지고 있어

의상 스님이 종남산의 여러 불교 종파 가운데 곧바로 찾은 인물은 지상사의 지엄 스님이었다. 사진은 종남산 지상사.[법보신문 DB]
의상 스님이 종남산의 여러 불교 종파 가운데 곧바로 찾은 인물은 지상사의 지엄 스님이었다. 사진은 종남산 지상사.[법보신문 DB]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의상(625∼702)이 찾아간 종남산(終南山)은 장안 서남쪽의 진산으로서 6∼7세기 수·당불교의 성지가 되어 신행의 삼계교, 선도의 정토교, 도선의 남산율종, 정연-지정의 지론종, 두순-지엄의 화엄종 등 여러 종파의 성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상이 종남산을 찾아간 때인 662년은 현장이 장안의 근교인 방주(坊州) 옥화사(玉華寺)에서 최후의 경전 번역사업으로서 659년 법상유식학의 대표적 경론인 ‘성유식론’ 10권의 번역을 마치고, 이어서 중관반야학의 중심경전인 ‘반야경’ 600권의 번역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현장이 ‘반야경’의 번역을 마친 것은 663년 10월23일이었는데, 이 작업의 과로로 인해 다음해 2월5일에 입적하였다.)

의상은 현장의 신역경전으로 인한 불교계의 파동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종남산행을 결정한 직접적인 계기나 이유는 알 수 없다. 처음 원효와 함께 당 유학을 결행하게 했던 동기가 현장과 그 문하를 흠모해서였으며, 또한 현장의 문하에서는 여러 명의 신라 출신의 유식학승들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유가 더욱 궁금하다. 특히 종남산의 여러 불교 종파 가운데서도 의상이 곧바로 찾은 인물은 지상사(至相寺)의 지엄(602∼668)이었는데, 그는 아직 이름이 불교계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사회적 활동도 활발하지 않아서 대외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화엄종도 당시로서는 이제 막 출발하는 새로운 종파에 불과하였음을 아울러 고려할 때 의상이 곧바로 지엄을 찾은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지엄은 현장의 신역불교에 대해서는 시종 소극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을 견지하여 ‘오십요문답’의 4교판론에서 소승·삼승·일승 가운데 삼승을 다시 초교(初始, 또는 始敎)와 종교(終敎)로 나누고, 그 초교에 현장이나 자은기가 중용하는 ‘성유식론’ 등의 신역 유식론서를 배당함으로써 현장·자은기의 법상교학을 낮은 단계의 불교에 위치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공목장’의 5교판론인 소승·초교·종교(숙교)·돈교·원교 등 5교로 구분하면서도 법상교학을 대승불교의 가장 낮은 단계인 초교의 위치에 배당하는 기본틀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한편 의상이 당시 한참 융성하던 법상교학을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불교인 화엄교학에 입문해 전수하여 온 것은 결과적으로 신라불교가 법상교학 이후의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잡게 하는 의의를 갖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도반인 원효에게도 영향을 미쳐 원효불교도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현장 이후 당 불교계의 발전방향과도 궤도를 같이하게 됨으로써 상호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의상의 불교는 지엄의 화엄교학의 전수에서 출발하여 시종 화엄교학으로 일관하였는데,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나 ‘송고승전’의 의상전에서 당 유학 시기의 활동 내용을 서술하면서 지엄 교학을 전수하여 왔다는 사실만으로 대서특필하였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특히 평가한 결과였다고 본다.

먼저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는 의상의 당 유학 중의 활동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전해주고 있다. “영휘 초에 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편승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주장(州將) 유지인이 청하여 관아 안에 머물게 하고 공양을 지극히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종남산 지상사로 찾아가서 지엄을 배알하였다. 지엄의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신주(神州, 중국)에까지 와서 덮고, (가지)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었는데,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가 하나 있어 광명이 멀리까지 비쳤다. (꿈을) 깨고는 놀랍고 이상하게 여겨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바로 왔다. 극진한 예의로 맞이하여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어제 밤에 꾼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다’고 하고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의상은 ‘잡화경’의 미묘한 뜻을 세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다. 지엄은 학문을 논의할 영특한 자질을 먼나 새로운 이치를 가르쳤는데, 깊이 숨어있는 것을 찾아내어 쪽빛과 꼭두서니빛이 그 본색을 잃은 것과 같이 스승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상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의 내용은 의상의 뛰어난 자질과 지엄으로부터의 화엄교학을 전해온 사실의 중요성을 염설(艶說)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뒷날 의상의 법손들에게 전승되어 갔던 설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송고승전’ 의상전에서는 이 사실을 중국인의 입장에서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으나, 지엄으로부터의 전법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 “의상은 장안 종남산의 지엄삼장이 계신 곳으로 곧장 가서 ‘화엄경’을 익혔다. 이 때 강장국사(법장)가 동학이었다. 의상은 ‘화엄경’에 대해 숨은 뜻을 알고 드러난 현상을 알았으며, 질서가 있고 강요가 있었으니, 덕의 병이 가득 차고, 불법의 바다에서 즐겁게 놀았다고 할 만하였다.”

지엄은 종남산의 지상사에 오랫동안 주석하였기 때문에 지상대사(至相大師)라고도 하며, 운화사에도 있었기 때문에 운화존자(雲華尊者)라고도 불리워졌다. 그런데 지상사는 원래 지론종의 사찰로서 그 창건자는 수(隋) 초의 정연(淵,544∼611)이었다. 정연은 지론종 남도파에 속하는 인물로서 그 학계는 혜광(慧光)-도빙(道憑)-영유(靈裕)-정연으로 이어져왔다. ‘속고승전’ 권11, 수나라 종남산 지상도량 석정연전에 의하면, 정연은 북주 무제(560∼578)의 폐불 때에도 지계를 지켰으며, 수 문제에 의해 불교가 다시 부흥하게 되자, ‘화엄경’ ‘지지론’ ‘열반경’ ‘십지론’ 등을 공부하는 한편 선(禪)에 안주하여 지관을 닦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유(518∼605)의 법을 계승한 다음에는 종남산에 은거하여 지상사를 창건하고 문도를 결집하였으며, 수 문제의 부름을 받기도 하였다. 정연은 611년에 지상사에서 입적하였는데, 그 제자인 법림(法琳,562∼639)이 이 절에 사리탑을 수립하였다. ‘속고승전’ 권24, 당나라 종남산 용전사 석법림전에 의하면, 법림은 627년에 당태종이 종남산의 대화궁 옛 집터에 설립한 용전사(龍田寺)에 머물렀는데, 뒤에 ‘변정론(辨正論)’을 지어 도선불후(道先佛後)의 국가정책에 반대하다가 황제를 비방한 죄목으로 탄핵받아 익주에 유배되었다가 병을 얻어 곧 입적하였다.

그런데 정연의 문하에서는 지정(智正, 559∼639)이 배출되었는데, 이 지정의 학계를 이어받은 사람이 실은 화엄종의 제2조로 추앙되는 지엄이었기 때문에 영유-정연의 계통이야말로 화엄종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속고승전’ 권14,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 석지정전에 의하면, 지정은 590년 수 문제의 칙명으로 섭론종의 북방 전파에 큰 공을 세운 담천(曇遷,542∼607)과 함께 낙양 궁궐에 초청되어 승광사에 주석하였으며, 601년에는 인각사에 초청받아 주석하여 대중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번잡한 것을 버리고, 종남산의 지상사에서 정연이 깨달음과 행실이 높아 추앙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상사에 가서 그를 따랐으나, 정연이 곧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길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후 지정은 지상사에서 28년 동안 주석하였는데, 그 생활은 공경 무사하였으며, 인간 세상과는 교섭하지 않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강론하여 바른 이론을 상세히 논하였지만, 청하는 사람이 없으면 곧 중지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관을 닦았다. 그리하여 세상 사정과 사람들과 만난 이야기는 그의 입에 담지 않고 곧고 꿋꿋하게 스스로를 독려하여 하루 육시정근(六時精勤)을 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639년 81세로서 본래 주석하던 지상사에서 입적하였는데, 그의 제자인 지현(智現)이 절의 북쪽 바위굴에 유해를 안치하고 명문을 기록하였다. 지정은 무릇 ‘화엄경’ ‘섭론’ ‘능가경’ ‘승만경’ 등을 그 차례를 기록할 수 없을 만큼 강의하였다. 그는 ‘화엄경소’ 10권을 지었으며, 나머지 저서는 모두 초기(抄記)인데, 전부 세상에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지엄의 ‘화엄경’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의 문은 지정에 의해 열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정의 지론교학과 ‘화엄경' 이해는 그 제자인 지엄을 거쳐 의상에게까지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상이 지상사를 찾았을 때는 지정이 입적한 지 이미 23년이나 지난 뒤였으나, 도선이 ‘속고승전’을 편찬할 당시에 지정의 저술들이 모두 전해지고 있었다고 하며, 종남산의 백천사(白泉寺)에 주석하고 있던 도선이 아직 생존하고 있던 연하의 후배인 지엄(도선의 생존연대는 596∼667, 지엄의 생존연대는 602∼668)을 존숭하여 ‘속고승전’ 권25 당나라 옹주 의선사 석법순전의 부전에서 지엄의 전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었다. “(법순)의 제자 지엄은 지상사에 그 이름을 드날린 승려인데, 어린 나이 때 그를 받들고 공경하여 자못 그가 남긴 법도를 따르고 있으며, 신용(神用)이 맑고 고귀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경부(京阜)에 떨치고 있다. 그는 ‘화엄경’과 ‘섭론’을 자세하게 강설하며, 감소(龕所)에 이르면 향천(鄕川) 사람들을 교화하여 이끌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후진(後塵)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도선은 지엄의 법계를 법순에게 연결시켜 지론종의 지정의 법계와는 일단 분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화엄종의 법계는 지엄의 생전에 이미 두순-지엄-법장으로 상승되는 것으로 공인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엄종의 학계는 혜광-도빙-영유-정연-지정-지엄-법장으로 상승되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화엄종의 교설은 북쪽 지방에서 발달한 지론종이나 섭론종의 교학을 받아들이고, 다시 당 초기에 현장이 새로 전한 유식학의 자극을 받아 성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종파의 법계로서는 민간에서 신승(神僧)으로 널리 알려졌던 두순을 초조로 하여 두순-지엄-법장의 계통을 정통으로 삼게 되었다.

두순(557∼640)은 법순(法順)이라고도 하였는데, ‘속고승전’ 권25 당나라 옹주 의선사 석법순전에 의하면, 그는 18세에 출가하여 인성사(因聖寺)에서 승진(僧珍)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업(定業, 禪)을 닦았다. 승진은 검소한 생활에 뜻을 두었으며, 평생 승직을 맡지 않았다고 한다. 두순은 승진이 입적한 이후는 종남산의 동편 여산(驪山)에 숨어서 오로지 정업을 닦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속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교화행을 펼쳤는데, 심중한 고질병에 걸렸거나 음사(婬邪)한 귀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언교(言敎)는 흔히 뜬구름 같은 말을 억제하고 뚜렷하게 이치를 말해 주었으며, 귀신이 깃든 나무나 귀신을 모신 사당은 보기만 하면 곧 불살라 없애고 무당들이 섬기는 곳은 몸소 버리게 하여 정돈하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유명(幽明)에 감통한다는 소문이 조야에 알려져 당 태종도 궁중에 불러들여 숭경하는데, 그는 욕심이 없었고 오직 성글고 낡은 옷만을 입었고 끝내 새 옷을 아울러 갖추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640년에 84세의 나이로 남쪽 교외의 의선사에서 입적하여 번천(樊川)의 북원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경읍의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상제(喪制)의 복을 입은 사람이 들판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달법사(達法師)·번현지(樊玄智)·지엄(智儼) 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지엄이 바로 화엄종을 개창한 사실상의 조사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72호 / 2023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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